겨울의 프랑켄슈타인

스물여섯 엄마의 스물한 번째 일기

by 김아현

타지에 사는 이십 대가 느끼는 감정이 그러하듯, 공허함과 육박전을 벌이던 시기가 있었다. 일상에 침투한 공허함은 단조로움을 진부함으로 변질시켰고, 심신을 침대 속으로 침잠시켰다. 무기력은 원치 않는 덤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되짚어 보는 일은 무의미했다. 그때의 무기력과 공허함을 현재의 불안과 맞바꾼 대가로 생각하면, 오히려 은은한 위로가 될 만큼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어려움이었다.


방송인 유재석이 바란 새해 소원처럼 하등의 문제가 없는 무탈한 일상의 연속이었음에도, 때가 되면 따박따박 입금되는 월급에 텐션은 잠깐 반짝일 뿐 다시 나선 곡선을 타며 하강했다. 오르지 않는 텐션 앞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상당 시간 지속되었다.


자취방과 학교를 오가는 단순한 일상 속에서 필요한 건 일탈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세 달이 막 되어가던 무렵이었는데, 돈을 모으겠다는 일념이 강해 나 자신에게 쓰는 돈이 거의 없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안 쓴다’기보다 ‘쓸 줄 몰랐다’에 가까웠다. 이따금 혼자서라도 짧은 여행을 다녀왔더라면, 무기력한 상태까지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어떤 순간에 살아 있다는 감각을 얻는 사람인지 알아보는 데 조금만 더 투자했더라면, 삶의 활력을 불어넣을 나만의 치트키를 하나둘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불안은 행동의 원동력으로 전환될 여지라도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긍정적인 면이 있다. 반면 무기력은 한 번 빠지면 그렇다 할 이득이 없기에, 웬만하면 틈을 주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역시 정작 무기력을 피할 재간이 없었던 덕(?)에 알게 된 것이었다.


그 시기에 전화로 무기력한 것 같다느니 자꾸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느니 하는 말을 엄마에게 자주 했다. 엄마는 “그럴 때는 돈만 모이지만 말고, 서울이나 다른 데 가서 놀다 오는 거야”라고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뮤지컬이라도 보고 올까?”라고 답하면서도 ‘그럴까’와 ‘그래도’ 사이에서 망설였다. 그러는 동안 손은 이미 네이버 검색창에 공연 중인 뮤지컬을 검색하고 있었다.


무슨 스쿠르지 영감 꿈나무도 아니고, 부귀영화를 누릴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아끼고 있었을까 싶었다. 뮤지컬 티켓 값이야 싼 편은 아니었지만—당시 VIP석이 15만 원이었다—그 한 번의 공연조차 허락하지 못하도록 아끼고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미련하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 종종 어린이 뮤지컬을 보러 갔던 기억이 떠올랐고, 그때의 나는 적어도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끌리는 공연을 찾으러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눈에 들어온 작품은 <프랑켄슈타인>이었다. 한창 규현 노래를 빠져 있던 시기였는데, 운 좋게도 그가 출연하는 회차가 남아있던 터라 순간 '이건 무조건 가야 한다'는 생각에 바로 예매를 해버렸다. 기꺼이 시간을 쓰고, 돈을 내는 선택 자체가 나에게는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12월. 엄청난 한파를 기억한다. 아이유의 strawberry moon을 들으며 새벽잠을 떨치는 것으로 작은 여행은 시작되었다. 괜스레 창문을 활짝 열어보았다. 새벽에 일어난 몇 안 되는 날. 닫혀있는 눈으로 바라본 세상처럼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제대로 날을 간 찬 공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껴지자 남아있던 몽롱한 기운이 마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서울은 얼마나 추울까. 바지 안에 기모 스타킹을 입고, 스웨터에 두툼한 양털코트를 걸쳤다. 평소에 잘 두르지도 않는 목도리에 장갑까지 챙겨서 거의 중무장하다시피 했다.


나갈 채비를 하는 동안 어느새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푸르스름한 하늘이 창을 비추고 있었다. 따뜻함이라곤 없는 차가운 햇볕이 가느다랗게 아스팔트를 훑고 있어도, 기대감은 파장의 굴곡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나와 함께하는 시간은 여러 갈래로 움터 뻣어나가고 있었다.


[스물여섯 엄마의 스물한 번째 일기 전문]


1. 2000. 11. 19.(일) - 뮤지컬 '개구리 왕눈이'


아빠랑 엄마랑 같이 공연 구경 구경 가려고 했었는데, 아빠는 바쁘셔서 회사에 출근하셨기에 붕어빵을 사들고 옥포극장에 갔었지. 친구들이 너무나 많이 모였더구나. 공연에 집중하는 아현이가 대견스럽게 보였어.


옆에 앉은 친구들은 졸려서 울고 엄마한테 떼도 쓰고 그러는데 의젓하게 앉아서 끝까지 보는 아현이를 위해 앞으로도 이런 곳에 많이 데리고 다녀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단다. 같이 동행하지 못한 아빠가 못내 아쉬우신가 봐. 재미있게 잘 봤냐고, 아현이가 집중하고 잘 보더냐고 물으셨어.


왕눈이 아빠께서 왕눈이에게 피리를 만들어 선물했었는데, 어느 날 연못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엄마 아빠를 잃어버린 왕눈이가 무지개 연못으로 가게 되었어. 그곳에서 예쁜 아롱이랑 코딱지를 잘 파먹는 심술쟁이 친구를 만났었지. 무서운 가재에게 잡혀있는 왕눈이 부모를 구하기 위해 왕눈이랑 친구들이 힘을 합해 가재를 물리치고 왕눈이는 부모님이랑 아롱이랑 심술이랑 무지개 연못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재미있는 이야기.

엄마도 재미있게 봤단다.


2. 2000. 12. 03.(일) - 아기 도깨비 '깨몽이'의 모험


인형극은 처음이지?


귀여운 도깨비 깨몽이가 혼자의 힘으로 착한 일을 많이 했을 때, 엄마 아빠 도깨비가 깨몽이 한테 요술 방망이를 선물로 주기로 한 내용이야.


깨몽이는 숲 속으로 갔었어. 어떤 착한 일을 할까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달팽이 아줌마가 천천히 기어가는 걸 보고 빨리 모셔다 드렸더니 괜히 혼나기만 했어. 달행이 아줌마는 천천히 기어가야 어지럽지 않거든.


그때 어디선가 큰 구렁이가 나타나서 깨몽이를 잡아먹으려고 했어.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깨몽이를 보고 구렁이는 굉장히 화가 많이 났었지. 얼마 전에 조그마한 맹꽁이한테 혼이 난 적이 있는 구렁이는 깨몽이를 잡아먹으려고 필사적으로 덤벼 들었단다. 깨몽이는 너무너무 무서웠단다.


그때, 또 어디선가 맹꽁이가 나타나 깨몽이를 도와줬는데 이번에는 둘 다 위급한 상황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깨몽이가 엄마 아빠께 부탁드렸어. 앞으로는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착한 일도 많이 할 테니 도깨비방망이를 좀 달라고 말이야. 결국 도깨비방망이를 얻은 깨몽이는 구렁이를 지렁이로 만들어 버리고 맹꽁이를 구해주는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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