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 엄마의 스물세 번째 일기
붉은 벽돌집. 닭장 옆 자주색 식탁용 의자. 무릎 위에 올린 반대쪽 발.
엄마 손을 잡고 밥 먹듯이 걷던 골목을 지나며 보곤 했던 것들이다. 그 의자는 이따금 삐걱거렸고, 흰 나시에 통 반바지를 입은 아저씨는 의자의 반동에 몸을 맡긴 채 신문을 읽고 계셨다.
아저씨 옆에는 언제나 초록망으로 둘러싸인 철창의 닭장이 있었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본 닭장 안은 늘 밤하늘처럼 검어 보였다. 해가 들든, 들지 않든 그 속에 몇 마리의 닭이 있는지 또 몇 마리의 닭이 사라졌는지 알 수는 없었다. 닭의 존재가 잘 느껴지지 않았던 탓인지는 몰라도 아저씨가 키우던 닭이 조용했는지, 요란하게 울어대고 있었는지, 그 울음소리 마저 기억에 없다.
맨발을 까딱거리며 신물을 넘기던 아저씨가 그나마 흐리게 생생했던 것은 검은 닭장과 대비된 까닭이었을까. 물방울이 떨어진 부분만 도드라져 보이듯, 아저씨와 주택과 검은 닭장은 각자 따로 번져 둥근 파편처럼 남아있다.
흐른 시간만큼이나 얕아져 버린 기억의 두께. 하지만 그 마저도 만약 엄마가 당시에 운전을 할 줄 아는 여성이었다면, 닭장과 아저씨와 골목에 자리한 붉은 벽돌집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었을까 싶다. 만들어질 수도, 각인될 수도 없는, 상상 같은 일이지 않았을까.
그 골목을 일종의 추억의 '필수 코스'로 기억하고 있는 것도. 아저씨에게 가까이 다가가 "이 아저씨가 닭 다 잡아먹었어?"라고 당돌하게 말하는 어린 나도. 그 일을 죽을 때까지 못 잊을 일화로 여기고 있는 엄마도 없었을 것이다.
느리게 걷는다. 방금 하차한 지하철과 버스의 속력과는 비할 수 없이 느리게 걷는다. 지나치는 것들이 많아진다. 차창 밖을 스친 숱한 장면들이 도망가고 남은 자리를 그것들이 채운다. 쌓인다. 가볍고 사소하고, 일상과 일상인 것들로. 붉은 주택과 신문을 집어든 아저씨와 닭장이 있던 골목을 걷는 일 같은 것처럼, 남은 것들은 그러하다. 사소한 것을 일컬을 이름을 필요하다는 듯, 자꾸만 걸음이 느려지는 건.
[스물여섯 엄마의 스물세 번째 일기 전문]
2000. 10. 14.(토)
아현아 밥 먹고 꼬꼬 보러 갈까?
우리 아파트 앞 주택에 어느 날부터 닭을 키우고 있었다.
지나가는 길옆이라 우리 아현이는 거의 매일 닭을 보러 다닌다.
“엄마 닭이 다르게 생겼어요”
한 마리는 수탉이고 2마리는 암탉이다.
다르게 생긴 닭이 신기한지 나름 닭들이랑 대화를 하면서 잘 놀곤 했다.
어느 날, 닭 한 마리가 사라졌다고 아현이가 걱정을 많이 했다.
“엄마 닭 한 마리가 없어졌어요”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가 잡아먹었나?
아무 생각 없이 내뱉고는 곧 ‘아차~’ 싶었다.
6살짜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을 텐데....
그 뒤 한 달쯤 있다가 또 수탉이 사라졌다.
“잉~~~ 할아버지 나빠. 또 잡아먹었어요.”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주인 할아버지가 잡아먹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거 같다.
근데 오늘 갔더니 마지막 한 마리도 없어졌다. 아현이가 할아버지 나쁘다고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였는데,
집주인 할아버지가 밖으로 나오셔서 의자에 앉아서 아현이를 보고 있었다.
아현이가 달려가더니 손가락을 할아버지 코앞까지 갖다 대며,
“엄마 이 할아버지가 닭 다 잡아먹었어요”
눈동자가 흔들리는 할아버지한테 어찌나 민망하던지 아현이 손을 낚아채서 빠른 걸음으로 돌아오는 내내
어르신한테 죄송하고 민망했지만 너무 웃겼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우리 아현이 동심이 파괴되는 날이었지만 오래도록 기억을 남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