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과 학생, 누구의 말이 맞는 걸까
여기서 난감하면 제대로 발목 잡히는 거다.
매일 같이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30통 이상의 전화를 받아내는 일상이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가던 날. 기적처럼 퇴근 시간에 딱 맞춰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서류 업무는 내일로 미룰 수 있지만 통화 업무는 '내일 할게요.'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퇴근'을 명분 삼아 문의를 받지 않는 행위는 자칫하다 도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내가 전화기 앞에 없었다면 모를까. ‘1분~2분 더 일찍 나갈걸’ 의미 없는 후회가 올라왔지만 벨 소리를 들은 이상 받아야 한다. 어깨 위로 가방끈을 올리다 만 손은 도로 긴장의 끈을 줍기 바빴다. 위장관을 타고 올라온 한숨을 급히 푹 내쉬고 의자에 도로 앉아 수화기에 반쯤 땀에 젖은 손바닥을 올렸다.
‘별일 아닐 거야, 금방 끊을 전화일 거야.'
하루 종일 이어진 전화 지옥을 마감하고픈 간절한 마음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한 여학생의 말을 들음과 동시에 자연스레 증발해 버렸다. 나는 곧장 여학생의 말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유치원에서 교외 근로를 하고 있던 한 여학생이었는데 학생의 내뱉는 말 한마디에는 침착함과 억울함, 답답함, 그리고 약간의 분노도 섞여 있었다. 상황은 이랬다. 출근을 한 후에 입력하지 못한 출근 기록을 기관 선생님께 수정해 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지만, 선생님께서 마지막까지 수정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여학생: "저는 계속 기관 선생님한테 출근부 수정 요청했는데 그분이 안 해주신 거예요. 그 시간을 인정해주지 않으시면 저보고 어쩌라는 거죠?"
나: "학생 출근부에 입력되지 않은 시간이 대략 얼마나 되죠?"
여학생: "20시간 좀 넘어요."
나: (속으로)'그래, 화날 수도 있겠지...... 본인이 일 한 대가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는데, 그럴 수 있지.'
여학생: 등록하지 못한 시간 수정해 줄 수 있나요?
나: 일단 내일 기관 담당자 선생님하고 다시 말씀 나눠보고 상황 정리되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지금은 직원들 퇴근시간이라...... 바로 해결해 드리기 어려워요. 내일 다시 연락드릴게요, 학생.
퇴근 시간을 더 지체하기 싫어서 내일 확인해 보고 연락 주겠다는 말만 서둘러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퇴근시간을 30분이나 넘기고 겨우 사무실 밖을 나왔지만 남은 저녁시간을 보낼 여유는 온데간데 사라져 있었다. 사실 학생과 통화하기 전에 이미 기관 담당자 선생님으로부터 상황 설명을 들은 상태였다. 학생이 기관 담당자 선생님과 한 차례 신경전이 오간 뒤에 나에게 전화했다는 사실을 곧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도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넋이 반쯤 빠진 몰골로 머릿속엔 의문만 맴돌았다. 생각을 하나 마나 달라질 상황이 아니란 걸 알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답을 뚫고 벗어나고 싶은 갈망을 쉬이 누를 수가 없었다. 기관 담당자 선생님의 말씀은 이랬다.
기관 선생님: 저희 반이 아니라 다른 반에서 근로를 했던 학생이라서 몇 시에 출퇴근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얼굴도 자주 보거나 하지 않는데, 요 며칠 오지 않은 것 같은 날짜에 출근부 등록을 한 것 같아서 인정이 안될 것 같다고 말하니, 학생은 분명 근로를 했다고 시간 인정을 해달라고 하네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 네, 일단은 학생이랑 통화를 해서 근로 시간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고 판단해야 할 것 같아요.
기관 선생님: 학생이 전화하기로 했어요. 선생님께 말씀드린다고 하네요.
선생님과의 통화 이후, 하필 퇴근 시간에 딱 맞춰 전화가 온 바람에 3일 내도록 불안해야 했다. 근로 시간을 인정해 달라고 말하는 학생, 출근도 하지 않고 시간을 몰래 등록한 정황이 의심스럽다는 기관 선생님, 학생이 출근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 않은 나 사이에서 뫼비우스의 띠를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이상적인 고민 앞에, 20시간이 넘는 시간을 입력하는 현실적인 방법. 바로 그것이다. 대학교에는 근로비로 생활비를 충당하는 학생들이 많기에 근로비는 학생들에게 유일한 동아줄과도 같다. 그래서 돈이 제때 지급이 안되거나 실제 일한 시간과 날짜가 출근부에 제대로 반영이 되지 않으면 곧바로 학생들의 항의 전화가 이어진다. 하지만 학생이 어떤 어떻게 출근하였으며 어떻게 일을 했는지 그 어떤 정황도 모르는 나로서 학생의 출근부에 대해 논할 확신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학생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날이 선 학생에게 최대한 기분 나쁘지 않게(?) 친절하게(?) 상황을 전달하려 했지만, 어떤 설명도 먹히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 느낌은 현실로 이어졌다. 출근하지 않고 출근부를 입력하면 그건 부정 근로라서 시간 인정이 힘들다고 말하니까, 나왔다고 말하는 주장하는 학생의 언성은 점차 높아졌다. 본인은 근로 시간에 제때 와서 일을 했고, 실수로 입력하지 못한 근로 시간이 수정이 되어있지 않은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말이다. 능숙하지 않은 말재간에 결국 갈팡질팡하면서 남아있던 용기도 사라지던 순간, 갑자기 남자 목소리가 불쑥 들어왔다.
남학생: 계속 듣다가 답답해서 말하는데요, 근로를 했다고 말하는데 왜 시간 인정을
안 해주는 거예요?
손에 들린 수화기가 떨리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을 의식하자 이제는 입이 떨리고, 입술도 말라가고 말소리도 파르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변해갔다. 정적이 흘렀다.
나: 네...??? 아...... 아.. 니...
남학생: 아니, 학교에서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냥 날라 가는 시간이 20시간이 넘는데
인정 안 해준다는 게 말이 돼요? 근로하러 가서 허튼짓 한 것도 아니고.
본인이 누군지 말하지도 않고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부분은 매우 황당하고 살짝 화도 났지만, 근로 시간을 인정해 줘야지만 내가 뭐라 대답할 명분이라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곧 부서로 찾아올 기세인 이 커플. 이쯤 되니 어쩔 수 없었다. 조금의 시간이라도 넣어주겠다는 말을 전했고, 다음 달부터는 제대로 시간 체크 후 수정 사항이 있으면 미리미리 확인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는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갈 때의 일이었다. 다행히 그 이후에 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문의 전화를 응대해야 하는 사람들의 난감함과 고충의 결을 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