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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NY Jun 04. 2024

총장님 오십니다

그들의 세계에서 펼치는 연극 한 편과 나

  지금부터 이것은 하나의 각본이자 연기이며, 연극 무대다. 단 한 사람을 위한 무대, 그 주인공은 정작 내가 식당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등장 예고도 없었다. 식당에 도착해서 ‘그’가 온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직원들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었다. ‘뭐야, 온다는 말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그’만의 극적인 몰래카메라 작전 성공에 걸려든 것 같은 이 찝찝한 기분. 같이 오지 않은 교수님이 부러워졌다. 먼저 도착한 직원들은 예상에도 없던 ‘그’와의 만남 속에 최대한 접촉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먼저 ‘그’와 멀리 떨어져 앉으려고 이래저래 잔머리를 굴렸다. 아직 오지도 않은 ‘그’의 동선을 미리 계산했고, 그나마 안면이 있는 편한 얼굴 옆에 앉으려고 자리를 차지하여 애썼다. 조금 늦게 도착하신 과장님들은 우리를 보며 ‘그’와 피할 수 있는 명당자리를 놓쳤다며 아쉬움과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셨다. 정말 ‘그’를 진심으로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현실이 선명해졌다. 다들 형식을 갖추고 먹고 스트레스 풀기 위해 이 자리에 모여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보였다.       

  먹기 위해 모인 회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한테는 그렇다. 주인공은 40분째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을까, 본인이 와야 직원들이 마음 편하게 식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를 기다리랴 40분째 식어가는 음식을 손끝 하나 건들지 못하고 멀뚱히 지켜보기만 하는 상황 속에 직원 선생님들의 인상은 조금씩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직원 선생님들의 마음에는 음식을 앞에서 허기진 상태로 기다리게 한 ‘그’의 배려 없는 태도에 대한 못마땅함과 짜증이 삐죽삐죽 고개를 쳐들었다. 계속 기다려도 오지 않는 ‘그’를 향한 일방적인 불평불만이 소리 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이제는 허기의 문제를 넘어 회식에 참석한 나의 선택이 후회의 관문을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러자 최대한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 구석진 자리에서 식당 칸막이까지 등지고 앉아있던 직원 선생님 한 분이 더 참지 못하고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나를 포함해서 테이블에 같이 합석했던 직원 선생님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녀의 젓가락질에 꽂혔다. ‘그’가 오든 말든 그냥 먹어버리자는 그녀의 행동 신호를 접수하고서는 대담한 척 같이 젓가락을 들었다. ‘드디어  먹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안도감이 밀려왔다. 조용한 테이블  분위기를 가로지르는  그녀의 저돌적인  젓가락이 먼저 비빔면에 도달하고, 다른 음식도 더 차가워지기 전에 음식으로서의 할 일을 수행할 수 있었다. 주인공을 기다린 지 35분이 지났을 무렵의 일이었다.     

 

  그 와중에도 다른 직원분들은 편하게 앉아서 음식 구경 한번 못한 채 충실히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저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 빨리 먹으면 때가 되었을 때 빨리 집에 보내주겠지, 그때까지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저 맛있게 먹고 있자는 생각만 했다. 밥 먹고 더 피곤해지기 전, 나의 휴식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떠날 궁리만 하면서 말이다. 기다림 끝에 드디어 ‘그’가 오시나 보다. 식당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장 차림의 비서팀 소속 직원분들은 어깨는 순식간에 경직되었고, 이들은 급히 어딘가로 통화를 하는 모양새를 취하고는 팔다리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장 식당 문을 열어젖히고는 박차며 뛰어나갔다.      

  이것은 연극이다. ‘그’가 등장하는 정상 타이밍에 맞춰서 음식이라는 소품을 준비해 놓고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직원이라는 관객이 서 있으며, 이들은 주인공을 만족시킬 환호와 박수를 준비하고 있다. 커튼콜 마지막에 등장하는 주인공에게 사인을 알려주는 스태프는 비서팀 직원분들이었으리라. 그리고 나는 호응을 담당하는 한 명의 관객으로서 이제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며 식당 문에 붙어있는 종소리를 기다리면 된다. 다만, 주인공이 커튼콜이 아니라 오프닝 단계에 등장하는 점이 다른 부분이긴 하지만 말이다. 


  '딸랑!' 종소리가 짧고 선명하게 울리고 문이 흔들렸다. 주인공은 바로 내 앞에 있는 문을 통해 들어왔다. 옆과 뒤, 그 뒤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직원들이 한, 두 명씩 엇박자로 일어나서는 알려주지도 않은 타이밍에 맞춰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나는 왜 ‘그’를 향해 박수를 보내고 있을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속박에 따라 손이 움직였다. 나는 9년 전에 ‘그’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수업하러 온 그에게, 그 어떤 박수도 환호도 해준 사람은 없었다. 그냥 그는 우리 학교의 코끼리 상을 조각했던 교수이자 선배, 그뿐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그는 한 단계 신분 상승을 거친 뒤,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충성을 한 몸에 받더니, 어느새 직원들의 인내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교수일 때 ‘그’의 모습과 총장님이 되었을 때 ‘그’의 모습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은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에서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곧 앉으라는 말에 따라 의자에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올렸다. 곧 파도타기를 시전 하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올 참이었다. 순간 여기가 80년대인가, 이 시대의 파도타기라 살짝 충격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술자리를 선호하지 않는 한 사람으로서 경험하는 새로운 문화라고 생각할 수밖에. 빨리 끊기지 않고 마시는 게 한국의 술문화였지. 내가 제일 비선호하는 한국 문화 중 하나. 이 문화에 적응하려면 재빨리 술잔에 물을 부어놓는 순발력과 파도타기의 시작을 놓치지 않는 빠른 눈치, 술을 잘 해독하는 위장과 '그'를 향한 아부가 필요하다. 테이블은 공간에 따라 각각 나눠져 있어도 술잔은 끊기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 기어이 도달했다. 파도타기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는 연기를 해야 했다. 연기에 특출 난 능력이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어쨌든 웃고 눈앞에 보이는 맥주병을 집어 들어 재빨리 '그'의 잔에 따라드려야 했다. 그 뒤에 파도타기는 2번 정도 더 이어졌다.


  겉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같아 보이는 그들의 파도타기.

  술로 이어지는 사이는 술이 없으면 끊어진다는 말이 왜 생각이 났을까.

  열이라는 외력이 가해지면 곧바로 기체화돼버리는 술잔 파도타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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