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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NY Jul 19. 2024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은 이제 그만

친절함의 그리움. 그 행동과 말에 대하여

  새벽에 눈발이 날릴 것 같은 추위다. 종아리까지 내려와서 무릎을 덮을 만큼 길고 두꺼운 양털 코트 주머니 속으로 차가운 손을 쑤셔 넣는다. 방학 기간이라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데, 누가 내 몸을 치기라도 할 것 같은 느낌이 겨울바람결을 타고 뺨을 스친다. 재빨리 얼굴을 코트 목카라 속으로 파묻었다. 


  찬 바람 때문인 건지, 나를 몰랐으면 싶은, 숨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인 건지 잘 모르겠다. 걸음이 서서히 빨라졌다. 빨간 벽돌 건물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밀려오면서, 건물에서 나올 때, 신생아처럼 꼭 움켜쥔 옹골진 주먹에 힘이 서서히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인지했다. 


  이렇게 꽉 쥐고 있었다니. 주머니에서 주먹을 꺼내서 찬찬히 살펴보았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팔 끝에 조약돌이 붙어있는 듯한 이질감을 느꼈다. 찬 공기 속에 주먹은 더욱 작고 하얀 돌처럼 보였다. 누구를 향했던 주먹이었을까.  

   

  이건 손이다. 손이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부드러움을 닮은 혈액으로 세포 구석구석을 채우던 손길이 머물러 있던 손을, 나는 가지고 있었다. 건물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는 절대 펼칠 수 없을 것 같은 옹골진 주먹을 아주 조심스럽게 펼쳤다. 순간, 손가락 관절이 제대로 펴지지 않는 것 같은 뻐근함을 살짝 느꼈다. 다행히 다섯 손가락이 정상적인 일자 형태로 펴지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손이 왜 차가워졌을까. 날이 추운 이유로는 근거가 부족하다. 일단 걸었다. 그러다 하늘로 높게 턱을 젖히고 시선을 아래, 바닥 쪽으로 꽂았다. 

     

  손바닥에 남은 손톱자국을 보니 곧 차가운 손과 싸늘한 공기가 정확하게 맞물려서 왠지 모를 이상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곧이어 명치에서 작은 분개감이 조용히 속을 채우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의 열기는 온도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정수리 끝자락으로 전부 몰려있었고, 호흡을 방해할 만큼의 거센 겨울바람도 뜨거운 정수리의 열기를 식혀주기에 그 힘이 부족한 듯 보였다. 곧 제어할 수 없는 묘한 두통이 찾아왔고, 잠자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전화를 사이에 두고 나누는 대화는 어째서 타인에게 이토록 쉽게 상처를 줄까. 얼굴이 없는 목소리의 위력은 순식간에 타인과 나를 갑과 을의 관계로 형성한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남인데, 얼굴도 모르고, 가족도 아니고, 아무런 관계가 아닌 사람에게 손쉽게 막말을 던지는 인간의 ‘공격성’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이토록 함부로 대하는 사회에서 ‘친절’이 숨 쉴 수 있을까, 의문이다. 머리에 몰리는 혈액의 압력과 스트레스는 매일의 대화에서 경험한 친절의 소멸과 인간의 무의식적인 공격성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 아무렇게 던지는 말, 말, 말. 나는 독화살에 묻어있는 독을 해독하기 위해 대부분의 저녁 시간을 보냈다.

      

타인: “누가 그렇게 하라고 지시한 겁니까? 선생님이 그렇게 정한 거예요?!”

속마음: 「아니요.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 얼굴도 모르는 남한테 이래라저래라 지시하겠습니까?」

     

타인: “지금 녹음하고 있는 거 아니죠? 문제 덮으려고 저한테 일부러 술수 쓰는 거죠?”

속마음: 「월 200만 원도 채 미치지 않는 돈을 받으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에 머리 쓸 에너지도 부족한 판에, 제가 뭐 얻을 것이 있어서 악의를 가지고 거짓말을 꾸미는데 시간을 투자합니까? 그럴 시간도 없고 마음도 없어요. 나쁜 일인 거 압니다.」  

   

타인: “학생들 대상으로 무슨 일을 이따위로 처리해요? 저 돈 못 받으면 책임질 거예요? 당장 학교는 어떻게 다니라고요!!”

속마음: 「섣불리 안내드렸던 점은 정말 죄송합니다. 근로 자리는 제가 자리 비는 기관 있으면 언제든 안내 바로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신 부모도 아니고, 딱 보니까 저보다 나이 많으신 거 같은데, 한참 어린 학생들도 자기 먹고 살길 알아서 잘 찾아요.」 

    

  속마음대로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거 누구보다 잘 아는 현실이 더 답답했다. 이쯤 되니, 다시 공부할 때가 좋았겠구나 싶은 마음도 비집고 올라왔지만, 그것 또한 훗날 나를 위한 솔직한 마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좋은 공부였다. 젊어서 서비스직에 몸담아 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 하지 않는가. 특정 업무의 담당자라는 이유로 ‘욕받이’ 역할을 하며, 나는 ‘친절함이란 어떤 태도’를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서로의 입장을 고려한 대화. 한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서로의 기억이 어떤 때는 다를 수 있음을. 자신의 기억이 어떤 때는 불완전할 수 있음을. 상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자르지 말기를. 악의를 가지고 한 행동이라고 몰아세우지 말기를. 주고받는 내용에서 놓치고 있는 정보는 없는지 확인해 주기를. 상대방이 먼저 얘기해 줄 거라고 무작정 의지하지 말기를. 스스로 모르는 부분, 혹은 질문이 있으면 최대한 빨리 말해주길. 가끔은 감사합니다, 고생합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빈 말이라도 좋은 말 해주기.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모여서 친절함으로 형성되어 상대방한테 전달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기를 바란다.

친절하면 불면증이 사라지고, 더 부드러운 대화가 가능해지고, 하루가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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