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進路) 찾기에 대한 솔직한 생각
30살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새삼스럽게 진로의 의미를 검색해 보았다. 진로(進路), ‘앞으로 나아갈 길’이라는 의미다. 국어사전에는 어디로, 무엇을 목적으로, 목표하여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 어떤 방향도 목적도 없는 추상적인 진로의 의미는 어떤 면에서 시적인 표현 같이 느껴진다.
사람의 길은 제각각 다르기에 구체적인 목적과 방향이 규정할 수도, 규정될 수도 없는 진로의 의미적 특성상, 어쩌면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인간은 자신의 길 앞에서 불안을 느끼고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노트북 화면의 검색창에 보이는 용어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리고는 문득 내가 무언가 착각하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히 애매하고 추상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선택들이 ‘진로(進路)’의 근본이라면 지금까지 나의 방황은 참으로 정당했다고.
꿈은 많았지만, 매번 현실과 꿈 사이의 타협에서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예상치 않은 길만 툭툭 튀어나왔고, 정체되는 느낌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해서 울었던 새벽도 참으로 길었었다. 그렇게 나는 당장이라도 뭐가 되어야 할 것 같은 강박을 쉬이 놓지 못했었다. 이런 내가 가슴 깊이 깨달은 사실은, 「방황의 시작과 끝은 다시 방황」이라는 것이다. 생각대로 된다고 반드시 좋다는 보장도 없고, 보이지 않는 길을 당장 찾을 수는 없는 법이다. 막막할 때 조급하면 오히려 심적으로 빨리 지쳐버린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번아웃과 우울감에 빠져버린다.
인간사에서 방황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방황을 당연한 인생의 과정이라고 여기지 못한다. 아마 어렸을 때부터 나에 대한 고민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하고, 흔히 남들이 몸담는 좋아 보이는 ‘직업’을 나의 인생에 쉽게 대입하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린 친구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여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것을 쉽게 좋다고 여긴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란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요즘에는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어렸을 적 나에게 ‘좋아 보는 것’에 쉬이 현혹되지 말고, 불투명한 미래지향적 선택들 앞에서 갖추어야 할 올바른 태도에 대해 알려주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이다. 인간이 자신의 길을 찾는 과정은 세 가지가 있다. 나는 어린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나랑 잘 맞을 것 같다고 생각한 일이 해보니까 안 맞을 수도 있고, 계획에 없던 일을 우연히 접했는데 잘 맞아서 업(業)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리고 적성에 안 맞지만,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에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사실 진로의 목적은 먹고살기 위함이다. 몸은 성인이지만 스스로 생존할 길을 찾지 못하면, 성인 노릇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서도록 하는 것, 그게 진로를 찾고 일을 하는 근본적 이유다. 좋고 싫음의 기준을 내미는 것은 우선이면서도 부차적인 일이다. 오히려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뭐라도 해보는 게 좋다. 그러면 생계와 새로운 경험, 둘 다 해결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아직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은 상태에서는 너무 계산하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좋다고 여긴 일이 배신할 수 있고, 우연히 생각지 못한 길을 찾을 수도 있다. 자신과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 반작용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고, 편하고 좋기만 한 직장에 머물고 있다면, 이직해야 하는 상황에 다른 일을 할 용기가 사라지는 부작용이 따르기도 한다.
아직 그리 넓지 않은 마음의 그릇은 좁은 소견으로 맞고, 틀림을 재단하지 않을 때 더 커질 수 있다. 방황을 견디는 힘이 생긴다. 역설적이지만, 어렵고 힘든 일을 할 때 가장 마음 근력이 탄탄해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변한다.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방황의 끝에는 방황의 연속이고, 길을 잃고 헤맬수록 다양한 기회와 성장을 경험할 수 있음을, 여러 변수가 도사리고 있는 현실 속에 너무 이른 하나의 선택에 고착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