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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

결국 길을 만드는 건 인간의 몫

by 김아현

여러 해를 통틀어 가장 하얀 바닥

도톰하게 쌓인 하얀 눈을 곁에 두고

우리는 같은 계단 층에 서 있었다

동생뻘 되는 남학생이 말했다


저기 반대쪽에는 눈이 녹았는데

여기는 눈이 안 녹았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이곳은 햇볕이 잘 들지 않아요


어쩌지 못한 모든 것

지우다 못해 덮인 것

녹지 않은 차가운 기억

녹지 않을 미래의 고통

녹지 않고 영영 남을 것 같은 느낌


긴 밤을 둘러 하나의 계절이 되기까지

생각으로 걷고 혼잣말로 토닥였던

숱하게 스쳤던 결심, 그 마음


남학생이 말했다.

이곳에는 햇볕이 잘 들지 않아요.


닦아주면

닦으며 녹아내리길 기다리면

해가 닿지 못하는 저어기 구석에

환한 볕이 있는 거지

마주하고 지워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나 봐.


그러니까, 그러니까

너에게는 따뜻한 햇볕이 있는 거지

너도 모르는


나의 발걸음 뒤로

뒤따라 오던 남학생의 발자국이

하나, 둘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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