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책, 책이 싫다면 따라 쓰는 건 어때요?
흰색 사각봉투 안에는 만 원짜리 문화상품권 세 장이 들어있었다. 엄마가 일터에서 생일 선물로 받아오신 문화상품권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받은 빳빳한 상품권을 한 장, 두 장, 세 장, 손가락으로 슥슥 넘겼다. 이걸 어디에다 써야 하나 싶은 생각을 하니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삼만 원을 작은 돈 취급하지 않기에 봉투에 들어있는 것이 이왕 현금이었으면 더 좋을 성싶었지만 그건 택도 없는 소리다. 만약 엄마의 수중에 들어온 종이가 상품권이 아닌 현금이었다면 엄마는 나에게 돈을 쥐어주지 않고 간접적으로 돈의 존재를 알려주셨을 것이다. 가령 이렇게 말이다.
"엄마 오늘 생일 선물로 삼만 원 받았다~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옥포에 옷 사러 갈래? 싫어? 그러면 D백화점 구경할까? 거기 공차 먹으면서."
"그러면 뭐 할까...... 너 스킨, 로션 있어? 선크림은? 올리브 O 가자, 하나 사줄게"
"흠, 집에...... 과일이 있나? 참외 먹을래? 사과는 집에 있으니까"
현금을 선물 받았을 엄마의 다음 행동은 딸의 눈에 너무나 훤했다. 차를 운전하며 눈에 닿는 대로 소비의 장소를 탐색하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돈은 속전속결로 사용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을, 딸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문화상품권은 구매처가 한정되어 있어서 당장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나한테 주신 것이다.
엄마로부터 받은 문화상품권 삼만 원은 쓰일 곳을 찾지 못하고 일주일 넘게 본가 책상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사고 싶은 건 오직 책 밖에 없었는데, 무슨 책을 사야 할지 좀처럼 갈피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저녁, 봉투의 겉면이 조금씩 헐거워지자 빨리 사용해야겠다 싶어 컴퓨터 전원을 켜고 교보문고 온라인 서점에 무작정 들어갔다. 그래도 특별히 사고픈 책을 없었다. 베스트셀러도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스크롤을 내리고 올리며 화면 속에서 정처 없이 왔다 갔다 방황하다 뜬금없이 엄마에게 "엄마, 사고 싶은 책 있어?"라고 물었다. 엄마가 준 상품권을 원래 자기 상품권인 양 사용하려는 딸의 태연함이 스스로도 좀 웃겼지만 뻔뻔스럽게 묻는 행동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 요새 어휘가 잘 생각이 안 나. 막 깜빡깜빡하고...... 큰일이다."
벌써? 오십 대 중반에 치매일 수는 없다. 너무 이르다. 그러면 안 된다. 실제로 치매는 아니셨지만 엄마의 걱정에 순간 심장이 찰랑거렸다. 밥 먹다 듣는 엄마의 염려스러운 고백에 속이 참 난감했다. 무슨 답을 해드려야 할까. 암기 연습? 일기 쓰기? 글 낭독? 뭘 권해야 할까. 나는 이 때다 싶어서 책을 좀 읽으시라고 권해드렸다. 그러나 독서를 권하는 딸의 말은 그리 효과적으로 먹히지 않았다. 엄마는 내 말을 흘려들으셨다. '그건 나도 아는데 잘 안돼'라고 스치듯 답하는 것 같던 엄마의 눈동자만 내 눈과 부딪혔을 뿐이었다.
씁쓸하고 답답할 만한 상황이었으나, 그 속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 이유인즉슨, 엄마는 독서 습관에 길들이지 못한 사람이란 걸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독서를 하셨으면 좋겠다는 나의 권유는, 마치 공부하기 싫은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하는 듯 한 말로 들리셨을 것이다. 나는 나의 권유가 그저 권유의 범주에만 닿을 것이란 운명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가 글과 가까워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만족할 만한 답을 듣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엄마에게 여쭌 것이다. "엄마, 사고 싶은 책 있어?"라고.
엄마는 답을 하지 않으셨다. 아니, 못하셨다. 혹시 나는 '역시나'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엄마에게 글 친구를 만들어드리기 위해 문화상품권을 사용하고 싶었다. 직진이 아니면 돌아가야 한다. 고민을 하다 문득 황리단길에 있는 작은 독립서점에서 소설과 에세이, 수필의 명문장을 따라쓸 수 있는 필사책을 구경한 기억이 떠올랐다. 필사책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나는 "안 그러면 매일 한 장씩 문장 필사 한 번 해볼래? 책 읽는 거 버겁잖아. 여기 장르도 다양하고 문장도 그리 길지 않아. 순서대로 써야 할 필요도 없어서, 목차보고 구미 당기는 작품 있으면 골라서 쓰면 돼. 어휘 설명도 잘해놓았네."
책을 쓴 저자도 아니고, 책 판매원도 아닌 나는 엄마를 컴퓨터 옆에 세워놓고 책 사진을 보여드리며 무작정 장점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필사하기를 필사적으로 권했다. 전체적으로 단아하고 깔끔한 디자인 때문인지, 빨리 쓰고 닫을 수 있는 짧은 문장의 매력 때문에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는 조금씩 필사책을 흥미롭게 여기기 시작하셨다. 샤워를 하러 안방 화장실로 들어가던 엄마는 옷을 벗으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오, 그거 사줘 봐. 매일 적어봐야겠다. 당장 사줘!"라고 장난스러운 말투로 재촉하듯. "그래!!!" 절실한 권유가 먹히는 기분이란 이렇게 통쾌한 것이로구나 싶었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신이 나서 세트로 구성된 필사책 두 권을 곧바로 주문했다.
그 후, 엄마는 필사책의 도착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셨다. 두 권의 책이 본가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카톡으로 책을 사진 찍어 보내주셨다. 그리고 한 권을 일터로 들고 가서 짬나는 시간마다 한 장씩 문장을 필사하시고는, 필사한 글을 또 사진 찍어 가족 카톡방에 공유하셨다.
엄마는 책이 너무 아깝다며, 복사한 종이에다 필사를 하셨다. 종이의 빈 공간에는 짧은 문장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조금씩 남기며 엄마는 알뜰하게 필사책을 활용하셨다. 이 글을 쓰는 도중에도 나는 엄마에게 말씀드렸다. 생각나는 문구는 수첩에다 적으시라고. 저녁마다 글을 적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카페에서 글을 쓰던 나는 엄마의 약속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착하는 방향은 최대한 여러 갈래인 것이 좋은 거구나. 쉽게 얻을 수 없던 다짐과 필사책에 빼곡히 따라 쓴 엄마의 글씨들이 떠오른다. 순간 이상했다. 글씨와 다짐이 이렇게 위로가 될 줄이야. 조금 둘러서 가도 되겠구나 싶은. 남몰래 간직한 마음이 느슨하게 이완이 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