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주고픈 책을 고르는 그 짧은 시간에 머물러
세 명의 지인에게 책을 선물했다. 모두 대학교에서 만난 인연들이었다. 책을 전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 한 가지는, 의도적으로 한 선택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인들에게 똑같은 장르의 책을 전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잘했다는 생각과 다행스러운 마음에 조용히 쾌재를 부르며 나 자신을 속으로 쓰다듬어주었다. 뿌듯하다는 표현은 이럴 때 사용함이 확실하다. 이왕 선물할 것 같으면 추구하는 방향도, 내용도, 구성도. 겹치는 것 하나 없는. 각각 개별적인 성격의 책을 선물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세 명 중 두 명에게는 본가에 잠시 내려온 김에 구입한 책과 함께 편지를 동봉하여 우체국 착불로 보냈었다. 인천에 사는 친구 영이에게는 언젠가 가리라 마음에 염두에 두던 북카페에서 구매한 산문, 이슬아 작가의 「끝내주는 인생」을. 부산에 사는 친구 정이에게는 아이작 뉴턴의「프린키피아」를 선물했다.
부산에 사는 친구 정이에 대해 잠시 한 단락을 빌려 소개하자면, 평소에 유독 고전문학만 골라 읽는 독특한 독서 취향의 소유자로 - 정말 고전문학 이외에 다른 장르에는 손을 잘 대지 않는다. 베스트셀러도 예외는 없다 -, 본인도 인정한 속된 말로 '고전문학 빠순이'다. 그녀는 고전문학 문외한인 나에게「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4권 세트를 생일날에 선물해 주었고, 오래 간 닫고 살았던 고전문학의 세계로 첫 발을 딛게 해 준 은인 같은 존재이자 최초의 자극제 같은 친구다.
언젠가 내가 고전 문학이 깊고 어렵고 이해하기 쉽지 않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단박에 반대했다. 절대 그렇지 않다고. 그 반응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친구는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무슨 뚱딴지도 그런 뚱딴지같은 소리가 어딨 냐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호, 그래? 고전도 읽을만하다는 거지? 갑자기 흥미로워진 나는 친구에게 고전 한 권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바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월든」의 사유적 깊이를 찬양하며 추천해 주었다. 친구의 강력한 말에 저항이 발 붙일 겨를도 없이 홀렸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본가 주변의 한 오래된 서점에서 그녀가 추천해 준 책을 구매하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책을 고르는 일이란 의외로 고심과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란 사실을 나는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책일지라도 만나는 독자에 따라 그 첫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아무리 내 입장에서 훌륭하다고 칭송하는 책이라 할지라도 읽는 이에겐 버거운 짐짝보다 못한 것으로 전락할 수 있고, 책 자체와 가깝지 않은 이에게 선물한다면 고마움 마음을 돌려받는 일은 어불성설일터. 차라리 선물해주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후회만 괜히 가질 수 있다. 그래도 책이란 좋은 것이니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이 도저히 꺾이지 않는다면 위에 부산 친구와 나의 사례처럼 고전이든 어떤 장르이든 간에 좋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결정적 계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좋다는 인식이 박혀야 한다.
그래서 책을 고르는 일이란 어떤 면에서는 나를 아는 일만큼 쉽지 않다. 선물 받을 이의 취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신중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천 친구 영이를 생각하면 어둡고 깊은 내용보다는 가볍고 산뜻함과 가까이 있음을 나는 느낀다. 문장이 대체로 길지 않으면서 깊은 표현이 적절히 가미된 하나의 단상 같은 이야기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로 산문과 수필, 에세이를 중심으로 선택했다. 높으면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한 없이 낮아지기도 좀 그럴 때. 적절한 수준에서 집중력에 구애받지 않고 오래 손에 붙들려 읽힐 수 있는 책에 대해 생각하며 영이를 위한 책을 찾고 있었다. 그 순간 이슬아 작가님의 책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남을 위해 책을 선택함에 있어 항상 성공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건 갑자기 떠오른 에피소드다. 나는 엄마에게 근래에 소설 한 권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자라면서 책 한 권 읽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던 엄마였다. 그만큼 책과 거리가 먼 엄마한테 새로이 독서하는 습관을 길러주고자 최진영 작가님의「구의 증명」을 선물해 드렸는데, 작가님께 개인적으로 면구스럽지만 그 책은 다시 나에게 돌아오고 말았다. 그래도 놀라운 건 엄마는 그 책을 읽으셨다는 사실이다. 물론 욕하시면서 절반이나 읽으셨다. 현실과 직설로 무장한 엄마의 정신세계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내용임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책을 먼저 읽고 추천해 드렸으면 몰랐을까. 아니, 생각을 잘못했다. 내가 먼저 읽었으면 엄마에게 추천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나는 그 소설의 씁쓸하고 괴기스러운 분위기와 인간 군상이 아름답고 슬펐는데. 그리고 그 점이 참 좋았었는데. 누군가에게는 열리지 않는 문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참으로 했다.
나머지 한 명에게는 직접 시집을 선물했었다. 일전에 함께 만나자고 정한 약속이 있었기에 서울에서 만나 즉흥적으로 시집을 구입하여 그 자리에서 전했다. 주변에서 유일하게 나와 같은 대학원 신분인 후배 옥이. 서울에 사는 대학교 후배가 그 주인공이다. 1년 7개월 만에 맡아보는 서울의 혼잡한 공기보다 더 오랜만에 만난 옥이는 어딘가 단단해진 모습이었다. 카페 알바를 하며 치열하게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동생은 여러 사람을 만나며 부딪히고 자신을 지키고, 떠나간 인연들에 대해 담담하게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슬픔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전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이 즐기듯 과거를 말하는 낙천적인 성향과 기억의 유연함에 나는 옥이를 다시 보고 있었다. 동생의 생명력은 참으로 강인했고, 그 점은 분명 배워야 할 점이라고 나는 두말할 것 없이 무릎을 쳤다.
삼 개월 전부터 내가 한강 작가님의 독립서점을 가고자 마음먹고 있던 것을 알고 있던 옥이에게, 나는 그 공간에서 이제니 작가의「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를 구입해 즉석으로 선물했다. 나는 그날에 후배가 시집에 반가워하는 모습을 처음 알게 되었다. 노을이 지는 서촌 골목을 함께 걸으며 옥이는 방금 나에게 건네받은 시집을 든 채 말했다.
시집은 읽고 싶을 때 읽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끝까지 읽지 않고, 눈에 닿는 글을 읽다가 덮고. 나중에 다시 펼쳐서 읽을 수 있어서 시집이 좋아요.
정말 열심히 사는 후배가. 앞으로의 길에 열심히 사는 지금의 모습대로 살뿐, 우는 일은 웬만하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만약 사람 때문에, 상황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절박함에 부딪힌다면 이 시집을 읽으며 흔들림이 서서히 잦아들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너의 말대로 자주 펼쳐 읽으면 우리는 더 단단해져 있겠지. 진열대에 꽂힌 시집을 손으로 빼내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