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를 잃은 大민원 시대가 도래했다.
2000년대 들어서자 인터넷은 우리 사회에 판도라의 상자가 되었다. 사회 전역으로 퍼져 나간 인터넷은 행정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태초에 빛과 그림자가 온 세상에 번져 나간 것처럼, 행정 또한 거의 모든 기능이 온라인으로 옮겨갔다. 온라인에 구현된 행정의 세상은 곧 민원으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1995년 정부가 처리한 민원 현황을 보면 접수 민원은 총 31,727건이었다. (95년 정부처리 민원현황, 1996. 국정뉴스) 그랬던 민원 접수 건수는 2011년에는 100만 건, 2021년에는 1,700만 건으로 폭증했다. 같은 기간 대한민국의 인구는 약 4,800만 명에서 5,100만 명으로 300만 명가량 늘었다. 인구 증가율은 10% 남짓인데, 민원은 수백 배가 늘어난 것이다. 인구 증가에 비해 민원의 증가는 상식적인 범위를 벗어났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전자정부가 우리나라에 ‘대민원 시대’를 만들어 낸 셈이다.
민원 수요가 폭증했던 것은 비단 정보통신의 발달 하나로만 설명되지는 않는다. 기술적 발전과 더불어 여러 사회적 환경들이 동시에 작동했고, 기술적 발전과 사회적 환경이 서로 맞물리면서 대민원 시대를 불러왔다.
사회적 변화 중 가장 큰 부분은 진정한 지방자치의 시행이었다. 군사독재 정권이 종식되고 들어선 문민정부는 유명무실했던 지방자치를 다시 세웠다. 1991년 기초의원 선거가 시작되었고, 1995년부터 전국동시 지방선거가 시행되었다. 이 제도적 변화는 지방행정의 성격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관선 시절 지자체장은 중앙정부에서 그저 내려 보낸 지침을 충실히 집행하는 사람이었다. 행정은 시민을 위하기도 했지만 관료 조직에 대한 복종은 시민보다 우선했다. 그러나 민선으로 바뀐 이후 지자체장은 시민의 요구에 기민하게 반응해야 했다. 지방의원들 또한 행정 집행을 감시하고 예산안을 심사하며 조례를 만드는 과정에서 시민의 눈높이에서 목소리를 반영해야 했다.
지방선거는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 사이에 놓여 있었다. 여당은 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단단히 해야 했고, 야당은 정권에 대한 심판을 해야 했다. 지방선거는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 민심의 향방을 가늠하는 풍향계가 되면서 그 중요성은 높아졌다. 지방선거의 위상은 날로 커졌다. 몇몇 광역자치단체장은 대선주자로 부상했고 실제로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지방의원은 풀뿌리 민주주의를 지탱하며 정당의 조직 기반이 되었다. 결국 선거에서 승리하려면 시민의 마음을 잡아야 했고, 행정은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요구받았다.
여기에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기반으로 한 신공공관리(NPM)가 행정 이론의 대세로 자리 잡았다. 신공공관리론은 행정과 시민의 관계를 서비스 공급자와 고객의 관계로 설명한다. 효율성을 기반으로 조직을 운영하여 시민 만족도를 높이는 것, 말하자면 기업이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을 행정에 이식한 것이다. 이전의 행정은 권위적이었고 시민은 수동적이었다. 그러나 신공공관리론 이후 “시민이 고객”이라는 관념이 널리 퍼졌다.
지방선거의 정착과 신공공관리론의 도입으로 행정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은 빠르게 바뀌었다. 행정의 문턱이 낮아진 만큼 시민의 입지는 올라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시민은 갑, 행정은 을처럼 굳어졌다. 시민들은 세금이라는 비용을 지불하고 공무원은 행정서비스를 제공한다. 본래 서비스의 수요자와 제공자는 대등해야 하는 사회적 관계였지만 어느 순간 신분적 관계로 바뀌었고 우리 사회 전반에 고착화되었다. 시민은 행정에 계속적인 요구를 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가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들어섰던 것도 민원 수요에 큰 영향을 주었다. 후진국이던 시절에는 기대할 수 없었던 복지, 교육, 사회기반시설, 문화 등 국가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행정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과거의 행정은 시민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기보다 국가 운영을 위해 시민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그랬던 우리나라의 행정의 목적이 국가 운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국민을 보호하고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게 되었다. 시민들은 국가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고 행정의 수요도 그만큼 올라갔다.
이 모든 정치적·사회적·문화적 변화 위에 인터넷이라는 도구가 놓였다. 인터넷은 변화를 수용하는 플랫폼이 되었고,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민원 처리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공무원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두 개의 민원을 동시에 처리해야 했다. 문제는 민원의 폭발적 증가 자체만이 아니었다. 온라인 민원의 처리는 그보다 더 큰 문제를 야기했다. 민원의 성격이 이전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