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삼모사 하 (재정 조기집행의 문제점)

잘못된 제도가 줄 세우기를 하면 그 평가는 올바를까?

by 유해길

조기집행은 또 공공기관을 평가하기에도 좋다. 정부에서 행정서비스를 어떻게 제공했는지 평가는 어렵지만, 조기집행은 집행률을 수치로 평가할 수 있어 편리하다. 이러한 평가를 통해 정부는 지자체와 공공기관을 통제한다. 집행률이 시민 만족도와 완벽한 비례관계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SOC 사업은 시민들의 삶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지만, 모든 SOC 사업이 그런 것은 아니다. 공공기관은 생각보다 쓸데없는 사업과 불필요한 일들을 많이 한다. 그럼에도 정부는 ‘재정집행률 = 시민만족도’라는 원칙을 유지한다.


캡처.PNG 돈을 빨리 쓴 것이 잘 쓴 것이다. 하지만 빨리 써야 상도 주고 인센티브도 준다.


관료의 입장에서는 시민의 만족도보다 ‘예산의 불용률을 낮춰 예산이 효율적으로 사용됐다’고 보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예산을 다 못 썼다는 것은 예산 수립 단계부터 잘못됐다는 뜻이 될 수 있으니, 재정에 맞게 예산을 다 썼다는 사실 자체가 1차 목표가 된다. 시민 만족도는 숫자로 표기하기 어렵고 보고서로 옮기기도 어렵지만, 불용률은 수치화할 수 있고 보고서에 넣기 쉽다. 그리하여 정부는 지자체를 평가할 때 예산의 조기집행을 반영한다. 2024년 기획재정부는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상반기 조기집행’ 가점 5점을 부여한다고 밝혔다. 매년 2~6월 전년도 재무건전성, 생산성, 비용절감 노력 등을 평가하는 경영평가는 공공기관에게는 한 해 성적표나 마찬가지다. 총배점은 100점인데 기관 종합등급이 C등급(보통)에 미치지 못하면 임직원 성과급이 사라진다.


E등급(아주 미흡)이나 D등급(미흡)을 받으면 정부가 기관장 해임도 건의할 수 있다. 전년도에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한 기관은 경영평가를 대비해 TF 팀까지 운영한다. 100점 만점에 가점 5점은 비중이 상당하다. 공공기관들은 조기집행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공공기관 입장에서는 목표율이 보고서 상의 숫자가 되어버린 순간, 원래 목적이었던 경기 부양이나 시민 만족도 제고라는 목표는 희미해진다. 회의를 할 때도 공사를 잘했는지, 혹은 시민들의 만족도가 높았는지보다 예산을 몇 퍼센트 소진했는지가 회의의 주제가 된다. 그 예산이 누구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사업 진행이 빨라 놓친 것이 없는지 같은 질문은 없어진다.


꼭 필요한 공사가 아닌 쉬운 공사부터 먼저 진행한다. 선급금 지급은 덤이다. 공사의 진행이나 준공도 한꺼번에 많은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제대로 확인하기 어렵다. 조기집행이 되지 않으면 기관장 해임까지 건의할 수 있는 마당에, 공공기관에서는 주민 만족도가 중요하지 않다. 그냥 돈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0008019879_001_20250114083513089.jpg 2025년 수자원공사 조기집행 내용. 선급 100% 지급하다가 떼이면 국가가 사기당하는 것이다.


지자체도 마찬가지다. 순위에서 뒤처지면 인센티브를 받기 힘들고 다음 해 예산 확보에 어려움도 있다. 복지나 돌봄 사업은 1년 내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조기집행을 위해 복지나 돌봄이 덜 필요해도 대상을 늘리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는 기간을 줄이는 식의 왜곡이 생긴다. 그 결과 필수적인 각종 사업 등을 진행하기 위해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야 한다. 조기집행은 정부예산의 비대화를 촉발시키게 되는 것이다. 지자체장들도 시민 만족도나 경기부양보다 조기집행률이 떨어져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한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조기집행을 할 수밖에 없다.


담당 공무원들의 어려움도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위에서는 집행률의 숫자로 압박이 들어오고, 1년이 걸릴 공사를 6개월 내에 해야 한다. 시민에게 꼭 필요한지 고민할 수도 없고, 공사가 제대로 됐는지 확인할 수도 없다. 20년 동안 조기집행이 경제적 환경에 적절히 대응했다는 잘못된 믿음만 반복된다. 그 문제가 잘못된 경로로 20년 넘게 굳어지다 보니 점점 더 가속이 붙은 느낌이다. 국민의 삶과 간극은 더 커지지만 일선 공무원들은 어쩔 도리가 없다.


조기집행의 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도 있었고 글로벌 금융위기도 있었다. 러·우 전쟁, 국제적 경기 둔화 등 국제적 문제나 제조업 위기, 건설경기 둔화 등 국내 경제문제 등 우리 경제를 위협하는 요소들은 언제나 상존한다. 정부는 이런 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필요하면 조기집행이나 적자재정을 운용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적인 상황임에도 상반기에만 70%에 육박하는 예산을 쓰는 것은 분명 과하다. 위기 시와 평시의 경제 운용 방식은 달라야 한다. 그렇다고 조기집행률을 한꺼번에 50%까지 낮추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1년에 1%씩이라도 낮추어 상·하반기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최소 10년이 지나야 겨우 예산의 균형이 맞는다. 이제는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해야 할 때다.


오락실을 좋아하며 용돈을 받자마자 탕진잼을 느꼈던 어린이가 25년 후 직장인이 되었다. 직장인이 된 나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소비 습관이 달라졌다. 어떤 달은 돈을 많이 써서 긴축재정이 들어가고, 어떤 달은 지출의 성질상 조기집행을 할 수밖에 없다. 조기집행은 유년기 시절을 떠올리게 하지만, 살아보니 지출의 정답이 항상 조기집행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부족한 월급으로 필요한 곳에 적재적소로 쓰는 것을 고민하게 된다. 정부 지출이 개인 지출처럼 유연할 수는 없겠지만, 대한민국은 25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소비 습관이 ‘탕진잼’인 것은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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