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언'서'판 상 (공직사회의 보고서)

공직의 세계는 보고서로 시작해서 보고서로 끝이 난다.

by 유해길

신언서판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 당나라 시대 관리를 선발하던 네 가지의 덕목으로 신(身)·언(言)·서(書)·판(判)을 뜻한다. 신(身)은 용모를 말한다. 외모의 단정한 외모와 깔끔한 옷차림은 상대방에게 호감과 신뢰를 준다. 상황에 맞는 옷차림은 기본적인 에티켓으로 통한다. 언(言)은 말솜씨를 뜻한다.


유창하고 적절한 언변은 상대방을 설득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는 큰 공감을 불러온다. 말은 자신을 돋보이게 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자신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말 특히 요새처럼 미디어가 발달한 세상에서 말실수 한 번이 쉽게 박제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서(書)는 글씨체와 문장력이다. 과거 선비들은 글쓰기를 단순한 정보 전달 기술로 보지 않았다.


글씨의 기운으로 수양과 인품을 평가했고, 문장력은 그의 학문적 성취와 세계관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마지막으로 판(判)은 판단력을 말한다. 과거 지방관료들은 행정뿐만 아니라 사법, 군사적인 역할까지 맡았다. 군사적 위기상황이나, 사건의 판결을 위해서는 정확한 판단력이 필요하다.


1181280_480132_3429.jpg 선비가 지녀야할 4가지 덕목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신언서판은 오래된 말이지만, 그 기준을 들여다보면 지금의 공직에도 필요한 기준이다. 공무원들은 국가의 정책을 수립하고, 예산을 집행한다. 또 민원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일들을 하는 여러 집단의 사람을 만난다. 그 과정에서 단정한 태도와 배려하는 말, 문서화하여 정리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사안에 대한 적절한 판단력이 필하다는 말은 당연하다. 공직자에게는 네 가지다 중요한 덕목이다.


유능한 공직자가 되기 위해서는 한다면 네 가지 덕목을 고루 갖추어야 한다. 거기에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과 따뜻한 배려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내가 내 생각에는 공직 사회에서는 이러한 항목의 중요성이 약간씩 변하고 있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네 가지 덕목을 갖춘 인재가 필요하지만 그 중요도가 다소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신(身)과 언(言)은 그저 사람을 대하는 기본 태도 정도로만 축소되고, 판(判)은 간부공무원만의 고유한 권한처럼 되었고 하위직 공무원에게 찾기 힘들다. 하위직 직원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서(書)밖에 없는 환경이 되어가고 있다. 즉 보고서를 만드는 능력만이 남은 것이다. 물론 사무직으로 일하는 사람에게 보고서 작성 능력은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보고서라는 것 자체가 본래 업무를 설명하는 도구다. 보고서의 유용성은 복잡한 상황을 정리하여 선택지를 제시하고, 빠른 의사결정을 돕는다. 또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해 향후 문제에 원활히 대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여러 의사결정자들이 합의한 사안을 조율하고 증빙하고 법적 근거를 확보하는 데에도 보고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잘 만들어진 보고서는 어떤 문제의 경과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핵심적인 사항을 확인하게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시장의 입장에서는 수많은 업무들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국장급만 되어도 업무에 대해 주무관처럼 세세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그들은 주무관들이 작성해 놓은 보고서를 통해 업무의 경과를 파악하고 맥락을 정확하게 짚어 빠르게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주무관과 결재권자는 보고서를 통해 소통을 이어간다. 그러다 보니 서(書)라는 기준이 차츰차츰 나머지 세 가지 가치를 합친 것보다도 중요하게 되기 시작한 것이다.


9791155581193.jpg 보고서를 작성하는 방법에 대한 수요가 높다. 책으로도 많이 나올 정도니 말이다.


보고서는 아랫사람의 입장에서도 의미가 있다. 구두로 보고하는 것보다는 깔끔하게 만들어진 ‘문서’를 통해 결재를 받아야 보고사항을 놓치지 않기도 한다. 구두로 보고를 할 경우에는 실수가 있지만, 문서로 만들면 여러 번 수정하기 때문에 실수도 줄어든다. 거기에 관공서에서는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회의가 많고 보고 자리도 많다. 시청에서 하는 공식적인 회의 외에도 있지만 지방의회, 유관기관과의 간담회 등등. 대부분의 회의의 흐름은 토론과 논의보다는 보고하고 지시받고 다시 보고하는 방향이나 또는 이야기를 듣고 확인하고 답변을 하지 토론이나 논의는 거의 없다.


이런 업무 환경에서는 보고서의 중요성이 더욱 빛이 난다. 짧은 시간 안에 사안을 빠르고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어야 불필요한 말은 줄어든다. 회의가 난상토론이 되거나 결론을 내기 위해서는 결국 현실가능한 대안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현실가능한 대안을 위주로 자료를 만들고 최소한 최소한의 단어로 만들되 중요한 부분은 놓치지 않고 담아야 한다. 그러니 보고서의 작성능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회의자료든, 보고자료든, 결재자료든 늦은 밤까지 사무실에 홀로 남아 눈이 빨갛게 충혈돼 가며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만든 보고서가 “잘 만들었네. 수고했다.”라는 결재권자의 한 마디와 함께 결재가 되면 보고서를 만든 주무관의 어깨는 으쓱하고 올라간다. 그러다 보니 어떤 분은 ‘공문이나 보고서는 얼굴’이라고 얘기하시는 분도 있고 ‘보고서 작성만 잘해도 공직생활 잘한다’라는 말을 하시는 분들도 있다. 또 보고서를 만들다 보면 업무의 맥락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하다가 말하는 분들도 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maxresdefault.jpg 야근의 주된 이유는 역시나 보고서 작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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