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는 결코 세상을 생동감 있게 담을 수 없다.
하지만 밤늦게 까지 야근하는 주무관들의 이런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고서는 태생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첫째, 보고서는 짧고 단순할수록 좋다. 직관적이고 빈틈없는 워딩, 가독성 있게 만들어진 보고서는 그 자체로는 완결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짧고 단순하게 만들어진 보고서는 어쩔 수 없이 현장을 납작하게 만들고 맥락을 적당히 무시한다. 긴 맥락을 다 담을 수도 없고 담아내서도 안된다. (만약 그런 맥락을 다 담고 자료의 전부를 다 담으면 보고서가 아닌 백서가 된다.)
회의시간 내 수많은 안건들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사소한 맥락들을 무시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맥락은 의도적으로 또는 필요에 의해 정리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불편한 맥락이 빠진 자리일수록 반듯한 폰트와 알록달록한 디자인이 들어간다. ‘시민 만족도 제고’, ‘조직 문화의 혁신 유도’와 같은 모호한 워딩들은 복잡한 현장을 매끈하게 포장한다. 하지만 모호한 워딩들은 현실의 복잡성을 설명할 수도 없고 결국 일반론 이상의 대안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세부적인 결정은 결국 일반론 정도에서 수렴하게 되며 현장에 대한 판단의 깊이는 얕아진다. 얕아진 판단은 정책 본래의 목적을 희석하는 경우가 있고 결국 사업의 효과를 크게 만들어내지 못한다. 가령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 겪고 있는 ‘지방소멸’ 또는 ‘지방 제조업의 쇠퇴’ 및 ‘외국인 노동자 증가’와 같은 문제의 원인과 해결 방안은 몇 장의 보고서로 당연히 만들 수도 없고 몇 번의 회의로 해결할 수도 없다. 하지만 보고서는 ‘고용효과 기대’, ‘지역 경제활성화 유도’와 같은 유려한 말들을 쓰지만 현실을 위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로 보고서는 책임의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만들기도 하지만,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만드는 경우도 많다. 어떤 문제에 대해 최선의 결정이었지만 차후에는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는 늘 “왜 그렇게 했나”라는 책임이 따라온다. 실무자는 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규정대로 진행했는지, 규정이 없다면 그 근거가 남아있는지 면책의 근거가 될 보고서를 만든다. 또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상황을 가정하기 때문에, 굳이 보고서를 만들어도 되지 않을 때 만들기도 한다. 물론 보고서의 결재라인이 길수록 책임은 분산되고 면책 범위를 넓혀주는 보험이 된다.
결재 라인이 길어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업무의 지연을 동반하지만 책임을 분산시키려면 필요하다. 가장 높은 사람의 결재까지 받는 것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하지만 이런 불필요한 보고서를 만드는 것은 불필요한 노동이다. 불필요한 보고서임에도 무더기로 만드는 이유는 공직의 이러한 책임 회피 문화와 과련이 있다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고서는 필연적으로 몇몇 사람의 권력으로 조직이 운영되는 병폐를 낳는다. 보고서의 내용은 중립적이지만 보고서라는 이름을 가진 종이는 조직 안에서 권력이 된다. 중요한 보고서는 실무자보다 귀한 대접을 받을 때도 있다.
스테이플러를 찍은 부분은 검정 테이프를 붙여 안 보이게 하고 결재판에 가지런히 넣는다. 페이지마다 다양한 색상의 띠지를 붙여서 날개를 만든다. 시장의 결재를 받아야 할 보고서를 가지고 국장의 결재를 받으러 갔다. 보고서를 확인하던 국장은 연필을 가지고 밑줄을 치고 부족하다고 몇 마디를 한다. “이건 부족하고 이 부분은 근거자료를 조금 더 첨부해야 한다” 같은 몇 마디를 얹는다. 수정하는 내용이 많아질수록 주무관은 난감하다. 사실 그 보고서는 주무관이 만들었지만 팀장과 과장의 손을 거쳐 이미 다른 보고서가 되어 있었다. 주무관과 팀장, 과장이 보고서를 잘못 만들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세 사람은 논의를 거친 후 나온 답일 거니까. 그렇다고 국장의 의견도 틀린 것은 아니다. 더 높은 위치에서 결재를 하다 보면 고려사항이 더 많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늘 결론은 상급자의 의견대로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담당자는 결재권자의 성향을 고려한 문서를 만든다. 현장의 문제점, 해결방안 등에 대한 고민보다는 빠르게 결재를 받을 수 있는 방법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사안은 점점 축소되거나 혹은 특정한 의도를 가진 시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1950년대 만들어진 일본 영화 「라쇼몽」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폐허가 된 라쇼몽 고대 일본에서 도시의 입구 역할을 하는 건축물 아래에서 나무꾼, 승려, 행인이 비를 피하며 있다. 이들은 사흘 전 숲에서 벌어진 무사 살해와 아내에 대한 폭력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나무꾼은 사흘 전 무사의 시체를 발견하여 관청에 신고했다. 승려는 같은 날 무사와 그의 아내가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행인은 두 명의 목격자로부터 이 사건을 전해 듣는다. 이들은 관청으로 가서 무사 살해사건과 관련된 진술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진술 내용은 모두 제각각이다. 결국에는 무당을 통해 죽은 무사의 영혼을 불러와 그의 진술을 듣지만 역시 일치하는 진술이 없고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영화 라쇼몽에서 사람들은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각 인물마다 왜 진술이 모두 다른지 그 이유에 초점을 맞췄다. 진실은 하나라도 사람마다 그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해석하는 데 차이가 있다는 당연한 세상의 원리를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