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사회 가짜노동의 중심은 보고서에 있다. 정말이다.
하나의 사건도 때로는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고 해결방법에 대해서도 여러 논의를 해야 효과성 있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하지만 보고서는 몇 개의 대안만 제시하며, 제한된 대안도 언제나 상급자의 결론으로 귀결된다. 실질적인 효과성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고 주무관의 재량권은 계속하여 축소된다.
이 과정이 계속되다 보면 몇몇의 결재권자가 가지는 방향대로만 가게 되고 하위직 공무원들은 판단하는 방법을 잃어버린다. 다수의 공무원이 영혼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또 소수의 인원의 의견이 결정권이 된다는 것은 그들이 가진 권력이 사유화가 될 위험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유화된 권력을 통해 결재권자는 조직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영향력 아래에서 부작용이 발생하면 갑질이 되는 것이고 또 갑질하는 문화가 팽배해지면 조직은 자연스럽게 폐쇄적이고 서열위주의 경직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그 사이 중요한 신(身), 언(言), 판(判) 같은 중요한 가치가 매몰되어 버리는 환경이 만들 진다. 이것은 단순히 공직자의 덕목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다른 가치들이 매몰됐다는 것은 보고서가 현실을 더 많이 대체하게 되고 탁상행정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다. 폭우로 비가 쏟아지고 있는 와중에는 현재 몇 mm의 비가 내렸고, 수재민이 얼마나 생겼는지에 대한 보고서는 나중 문제다. 도로를 즉각적으로 통제하고 시민들을 재빠르게 대피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공직사회는 판단력보다는 보고서를 만드는 능력을 중요하게 본다면 판단은 늦어지게 된다.
또 수해피해를 입은 사람은 보고서에 00 가구 000명으로 표기가 된다. 종이에는 그냥 글자 몇 자고 한 두 문장이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수재민들은 정말 죽을 맛이다. 체육관 같은 곳에서 모여 지내는 데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보고서를 통해 맥락을 파악한다면 그들의 어려움을 절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정책이 시민의 입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탁상 위의 편리성 위주로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공직에서는 사건에 대한 빠른 판단이 점점 늦어지고, 사람에 대한 배려도 희미해져 간다. 대신 보고서라는 이람의 불필요한 가짜 노동은 늘어난다.
업무시간의 1/4 가까이를 불필요한 노동에 쏟고 있는 것이다. ‘가짜노동’에 멍드는 공직, 하루에 2시간 넘게 불필요한 문서, 회의에 허비 (경향신문, 2025.4.24.) 그 시간에 다른 업무를 한다면 초과근무를 할 필요도 줄어들 것이고, 업무 능률이 더욱 올라간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AI가 갈수록 발달하는 세상에서 보고서 만드는 능력은 AI를 통해 대체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인간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한다. 공무원은 민원인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단정한 태도와 외모, 민원인의 입장에서 문제에 대한 판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친절하고 따뜻한 말들.
이런 능력들이 AI 시대에서 공직자가 시민들의 마음을 만져주는 것이다. 보고서 작성이라는 서(書)는 AI가 대체할 수 있지만, 신(身) 언(言) 판(判)은 AI가 대처하기 힘들거나 부분적으로 밖에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직사회는 언제나 보고서에만 매몰되어 있는 느낌이다. 이제 공직사회는 바뀌어야 한다. 보고서를 통해 현안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고서의 내용이 현안 업무의 전부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불필요한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보고서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향에 대해서도 지양해야 한다.
가짜노동의 시간을 줄이고 시민에게 필요한 서비스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직원들을 덜 소모시켜 가며 일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그렇게 줄인 시간이 사무실에 잠깐 숨 쉴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또 그 시간이 시민들을 위해 문제를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또 그 시간이 현장을 한 번 더 둘러보고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시민들이 느끼는 행정서비스의 품질은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