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부터 내리던 비가 아침에는 내리지 않자 나는 곧바로 새벽 5시 30분 성산일출봉으로 나섰다. 차로는 약 5분 거리로 가까워질수록 높이 솟은 웅장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성산일출봉의 입구는 일출봉과 맞닿은 곳으로 푸른 목초지가 생기 없어 보이는 일출봉에 생기를 불어 넣고 있었다. 차를 주차한 후 사진을 찍기 위해 삼각대와 필름 카메라를 챙겼다
차에 내리자 심한 바람 탓에 반팔과 반바지 차림이 너무 추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일출봉에 오를 사람들은 모두 긴 팔이었다. 역시 여행에 긴 팔 하나씩은 챙겨둬야 한다. 입구를 지나자 넓은 목초지에 내가 오를 길이 보였다. 약간의 경사와 흐른 날씨와 찬 바람, 그리고 일출봉에 오를 계단이 듬성듬성 보였다
‘정말 올라도 괜찮을까’란 마음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어젯밤 ‘비가 와도 오른다’란 기억을 상기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나 올랐을까 아주 조금씩 구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추위가 걱정됐지만 오르다 보니 춥지 않았다. 화장실을 지나자 중국인 관광객들이 계단이 시작되기 전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쿨하게 지나치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는 중간중간 기념비 같은 돌기둥이 팻말과 함께 솟아 있었다. 그곳에 내려다보는 전경은 벌써부터 정산에 다다른 것처럼 멋졌다. 하지만 더 가야 한다. 계단은 생각보다 많았다. 점점 허벅지가 커지더니 살짝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곧 3분의 2지점인 전망대에 도착했다
다시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여기까지 온 것도 나쁘지 않아, 내려갈까?’ 헐떡이는 숨을 내쉬며 정상 쪽을 바라봤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마음의 소리를 무시한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왼발과 오른발, 굽혔다 펴기를 반복하자 정상에 가까워졌다. 바람과 나뭇잎 소리에 드디어 사람들 소리가 섞여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상 끝에 오르자 성산일출봉의 움푹 패인 모습과 수평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흐린 날씨 탓에 일출을 찍으려 했던 계획은 물 건너 갔지만 이런 제주의 모습도 자연스러운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됐다. 숨을 고르며 필름 카메라에 삼각대를 세워 원하는 장면들을 찍었다. 끝까지 해는 볼 수 없었다. 오늘은 허락되지 않은 것 같았다
구슬비는 조금씩 내렸다 멈췄다를 반복했다. 조용히 일출봉의 끝과 끝을 바라보고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날씨도 인간이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전날까지 비가 내려 가지 못할 것 같은 예보에도 아침이 되자 비가 오지 않았고 이렇게 오를 수 있었다. 우리는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그 결과까지 어찌할 수 없다
그래서 삶도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시간을 통제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낼 수는 있어도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런 삶에서 우연한 만남과 기회들이 기적과도 같을 때가 있지 않을까. 성산일출봉에 내려가는 내내 이런 생각에 잠겼다
나는 올랐고 내려오며 겸손을 배웠고 약간은 새로워짐을 느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