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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May 21. 2019

시식용 재능을 가진 사람의 단상

     스스로 마음에 꼭 드는 글을 쓰고 나면, 나 자신의 애독자가 되어 그 글을 열 번쯤 읽어 보고는 곧 글이라는 것에 대한 애닳는 마음으로 우울해져버린다. 성능 좋은 카메라처럼 내가 가진 것보다 더 풍부하게, 화려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쓰고 싶다는 욕심에 닿았기 때문이다. 집중력 부족으로 다 읽지도 못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를 생각한다. 번역판으로도 열장을 채 넘기지 못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미세스 댈러웨이를 생각한다. 마케도니아의 초록 강에서 무작정 건져 올리는 끝없이 엉킨 수풀을 떠올린다. 수풀과 같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소리 없이 울던 해질녘을.


     어릴 때부터 잔재주가 많았다. 오히려 못하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꿈을 꿨다. 그래서 여러 가지 꿈을 접었다. 뛰어오르려다 우물 벽에 부딪혀 상처만 늘었다.


     화가가 되고 싶었다. 기억나지 않는 오랜 순간들에 나는 항상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들고 있었고, 그림 그리는 엄마가 옆에 있었고, 이젤을 앞에 두고 빛나는 이모들의 눈에 둘러싸여 있었고,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거장들의 그림에 매료된 아이었다. 그래서 우물 벽에 부딪혔을 때 가장 크게 다쳤다. 그림을 포기한 엄마의 손을 잡고, 하얀 벽과 은은한 조명 아래 이모들의 그림 앞에 선 마지막 울음을 기억한다. 이후로 약 십년간 낙서조차 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닌데, 내 손과 마음은 내 생각보다 더 단호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지배당할 때 마다 그림 그리던 내가 생각난다. 뭐든 잘하지만 약간의 감각 이상의 재능은 없는 나.


     나는 실비아 플라스가 아니니까 이렇게도 애닳는 마음을 확인하는 날은 위험한 거다. 애꿎은 잠만 쫓아내 나를 노트북 앞에 끌어다 앉히는 거다. 그리고 다시 확인하게 하는 거다. 나는 재능도 없고 최선의 노력도 할 줄 몰라서 결국 그렇게 이런저런 감각들만 잔뜩 끌어다 쓰며 살 것이란 걸. 너무 사랑하다 보면 너무 아플 것이란 걸. 그래서 십년쯤 차갑게 연을 끊고 살다 어느 날 우연히 ‘아, 내가 그렇게나 사랑했었지.’ 할 거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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