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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Jul 04. 2019

폴리냐뇨의 작은 항구. 냉동 야채 파스타.

2019.06.24


카페에서 크로아상을 먹고 소이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절벽 사이의 해변으로 가 낮잠을 잤다. 온 몸에 땀이 줄줄 흐를 때 쯤 깨서 스페인어 책도 좀 들춰보고(이탈리아 이후 스페인에서 잠깐 어학연수를 한다.) 몸도 한번 적셔보고 하다 보면 이탈리아에서의 시간은 아쉬울 정도로 금방 간다.


오늘 예약한 숙소는 관광지를 벗어난 조용한 해안가에, 정말 평화로운 곳이었다. 부엌도 넓고, 화장실도 넓고, 채광도 잘 되고. 마당이 넓어서 더 좋았다. 덕분에 마당의 하얀 선베드에 수영복 팬티만 입고 앉아서 하늘 구경도 하고 글도 쓰며 아무 걱정 없는 시간을 보냈다. 가끔 앞집 사람들이 허리 높이의 담장 위로 빼꼼 등장해 유유히 지나다니긴 했는데 서로를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게 늘어져 있다가 4시쯤 장을 보러 가자고 나섰는데 슈퍼마켓 가는 길이 공사중이다. 우리가 향하던 그 슈퍼마켓 외엔 다 당연히 낮잠 자는중. 그래서 한참 헤메기만 하다 낮잠 시간이 끝나는 5시에 칼같이 슈퍼마켓에 갔는데 젤라또 가게만 열려있고 슈퍼마켓이나 다른 가게들은 아직도 잔다. 그래서 비건 베리와 다크초코 젤라또를 사먹으며 기다리려는데, 처음 가본 젤라또 가게 퀄리티가 역시 이탈리아! 하는 탄성을 자아낼 정도라 기분이 나아졌다.


대충 살자, 이탈리아. 이탈리아에선 너무 많은 걸 기대하면 안된다. 넘쳐 흐르는 여유와 그래서 어이없는 일들을 웃어 넘기는 게 이탈리아의 삶. 슈퍼마켓이 늦게 열면 늦게 여는 대로 젤라또나 사먹으며 기다리라는 것이 이탈리아의 교훈. 젤라또를 다 먹을 때 쯤 열리는게 이탈리아 슈퍼마켓!


슈퍼마켓에 드디어 입성했는데 야채가 하나하나 다 플라스틱 포장 되어있다. 근처에 다른 슈퍼마켓도 없고, 관광지라 야채가게 찾기도 너무 어렵고. 그나마 포장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대안으로 파스타면, 두유, 냉동야채 한봉지를 샀다. 야채 두세가지를 사는 것보단 한봉지에 여러가지 든 게 나으니까. 냉동야채는 안 좋아해서 인생 두번째로 사보는데 여기 냉동야채 퀄리티 엄청 좋다. 야채가 10가지 넘게 들었고 콩도 종류별로 들어있다.


숙소로 돌아가 다시 선베드에 앉아있다가 해 지기 30분 전에 요리를 시작했는데 제시간에 끝내지 못해서 요리하다 말고 급하게 선셋 보러 나갔다. 숙소가 그렇게나 사랑스러운 올드타운과 약간 거리가 있어서 여기선 좋은 풍경을 못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숙소 바로 앞에도 작은 절벽(혹은 언덕)을 낀 아주 작은 해안이 있었는데, 올드타운 해변의 웅장한 절벽, 건물과 달리 작고 하얀 건물들로 둘러싸여 너무 아름다운거다. 게다가 하얀 계단을 올라 언덕을 넘어가니 잔디 깔린 너른 들판과 바다, 들판과 바다의 경계 위에 점점이 주차된 캠핑카와 춤추는 사람 두어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엔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는 지는 해.



선셋을 보고 돌아와 마당에서 냉동야채로 만든 크림 파스타를 먹는데 또 웃음이 난다. 와, 우리 진짜 대학생 여행자같다(맞다), 냉동야채라니, 그것도 이렇게 큰 팟에 냉동야채랑 파스타를 잔뜩 볶아서. 그렇게 깔깔대며 먹고 있는데 담장너머로 앞집 아저씨가 맛있게 먹으라며 인사를 한다. 아직 분홍, 주황으로 빛나는 하늘은 덤이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집 앞 해변의 작은 절벽 위, 하얀 식당으로 맥주를 마시러 갔다. 절벽을 따라 난 하얀 계단을 30개쯤 올라야 하는 곳. 눈 앞으로 바다와 하늘이 끝없이 펼쳐진, 근데 사람은 우리밖에 없는 곳이다. 처음 보는 칵테일을 시켰는데 온갖 스파이스의 향과 상큼한 라임향을 특징으로 한 ‘저세상 존맛’(내가 자주 쓰는 표현이다. 번외로 지옥의 존맛이 있다)의 칵테일과 부르스게따가 나왔다. 시키지 않았는데 나온 부르스게따를 보며 ‘여기 사람들은 술 마실때 안주를 먹나? 이거 기본 안주인가?’온갖 가설을 펼쳐봤다. ‘한국 스타일 레스토랑인가? 셰프가 한국에서 유학했나?’ 술 마시며 안주 먹는건 우리나라 문화라고만 알았지, 유럽에서 이런 ‘기본 안주’는 처음 받아봤다. 게다가 친절한 남직원이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친근하게 말을 걸면서 브루스게따 맛있냐고, 또 준다고 하는걸 말렸다. 남부 이탈리아의 정... 인심... 뭘까... 좋다.

레스토랑에 앉아서 내일 갈 숙소를 찾다가 갑자기 살레르노(로마 아래, 서남부)행이 결정됐다. 폴리냐뇨는 동남부고. 처음엔 해안 따라 부츠 굽까지 쭉 내려가고 싶었는데 급 내륙을 가로질러 가기로 했다. 스페인 갈 날이 얼마 안남아서 로마로 이동해야 하는데, 운송수단 중 가장 탄소 발생량이 높은 비행기를 또 탈 순 없으니까. 아말피, 포지타노같은 유명 관광지도 궁금하긴 했는데 숙소 가격 보고 바로 마음을 접었다가, 그 옆인 살레르노에서 묵으며 아말피, 포지타노, 소렌토 근방도 한번 훑어보고 그 아랫동네인 안 유명한 해안동네들을 가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살레르노는 아말피 근방인데도 숙소가 싸다!


바로 다음날 아침 6시(정확히는 7시간 후)에 폴리냐뇨 아마레에서 살레르노로 가는 4시간짜리 버스를 끊었다. 안녕! 폴리냐뇨의 작은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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