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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Jul 04. 2019

간만의 도시, 살레르노. 자유의 바다, 첸타라.

2019.06.25


일기를 매일 밤에 써야 하는데 이탈리아의 여름은 해가 10시 넘어야 지니 정말로 해가 지고 난 밤엔 뻗어 자기 바빠서 일기를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카페에서 아침 먹으면서 쓰게 되는데 아무튼 결론은 밀리고 밀린다. 어제 문득 느낀 게, 이번 이탈리아 여행은 이후 스페인 일정 덕에 시간이 무한정 있는게 아니라서 더 소중하면서도(보통은 시간이 무한정인 여행을 한다) 자꾸 매 시간 뭔갈 해야한단 생각이 든다. 와중에 역설적이게도 우린 게을러서 10시쯤 눈을 뜨고 11시쯤 침대에서 일어나며, 12시쯤 카페에서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 다시 눕거나 또다른 게으른 일을 찾는데, 그렇게 3시쯤 집을 나서도 이탈리아의 여름 해는 하늘의 궤도를 느릿느릿 기어가며 우릴 기다리고 있다. 게으름뱅이의 천국, 이탈리아 남부. 삶이 여유로울 수밖에 없고, 웃음이 날 수 밖에 없고, 짜증을 낼 수가 없다.

아침 6시 반에 살레르노 가는 버스 타기 성공. 버스 타러 가는 길, 종종걸음으로 지나며 동시에 열린 카페를 찾아 크로아상을 사려고 빠르게 눈으로 스캔하는데 꽤 많이 열려있다. 해가 질 때 쯤에야 하나둘씩 집밖을 나서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는 걸까. 여유롭고 게으르게만 보여도 그들의 활동 시간은 매우 이른 아침부터 매우 늦은 밤까지 이어진다. 낮잠 시간에 다들 칼같이 잠만 자는 이유.


간만에 타는 중거리 버스라 버스 안에서 할 일을 잔뜩 만들어놨는데 바깥 풍경을 입벌리고 구경하다 보니 4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내륙을 통과하며 보이는 산맥과 산맥 위 점점이 박힌 집들이나 산 꼭대기 웅장한 도시의 올드타운 건물들덕에 4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살레르노에 도착했다. 우리가 가본 도시 중 그나마 제일 큰 도시가 아닐까 싶은 곳, 가로수로 온갖 파스텔톤의 꽃들이 다 휘어지게 만발한 곳이다. 여름 에 나무에 열매나 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가지가 휘는건 비옥하고 햇살 좋은 유럽 특유의 풍경이다. 작년 동유럽을 일주할 때도 그 비옥함에 항상 웃음이 났다. 열매가 너무 많으니 다들 먹다 먹다 그냥 방치한다. 그럼 나같은 여행객이 지나가다 옷가지에 한바구니씩 따가며 먹는 것. 살레르노의 가로수는 가지가 정말로 다 휘어져서 고작 162cm인 내게도 길을 걷는데 머리에 부딪히는 장애물이 너무 많다. 아, 그리고 날씨가 동남부보다 훨씬 덥다. 정말 덥다. 볕이 온 몸을 꿰뚫는듯한 날씨다.

어제 밤에 예약한 에어비앤비 숙소를 찾아갔는데 너무 일찍이라 그런지 주인이 집에 없는 듯 했다. 그래서 오는 길에 찾아놓은, 살레르노 유일의 비건식당 (심지어 숙소에서 코앞)으로 갔다. 문을 열자마자 향신료 냄새가 은은하고, 이탈리아식 파란 타일의 화덕이 눈에 띄는 곳. 테이블엔 핸드폰 사용 금지를 의미하는 그림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친절한 직원이 나와 영어로 엄청 열심히 메뉴를 설명해줬는데, 아무리 들어도 잘 모르겠어서 그냥 면류, 밥류 하나씩 달라고 했다.

그리고 등장한 메뉴1은그냥 소금, 기름맛 볶음밥을 소주잔만한 크기로 뭉쳐 두덩어리, 소금맛만 나는 쿠스쿠스같은것 두 덩어리, 채 썬 상추와 당근에 간장만 약간 뿌린것,  딱딱해서 썰리지 않는 얇은 토스트에 취나물같은 나물을 죽이 되도록 삶아서 올리고 강낭콩 소스(강낭콩 통조림과 싱크로율 100%)를 올린 음식이었다. 여기서 상당히 실망했지만 그래도 간만에 밀가루 아닌 건강해보이는 밥 먹는다고 합리화 성공. 근데 두번째로 등장한 ‘당근 크림 파스타’가 문제였다. 그냥 흰 접시에 검보라색 소스로 휘감긴 파스타만 덜렁 나왔는데, 100%춘장맛만 났다. 엄청 배고팠지만 이건 차마 먹을 수가 없어서 노력하다 포기하고, 계산을 하려는데 24유로란다.
피자 한판이 4-5유로, 파스타도 해변 바로 앞에서 먹어도 10유로인 이 나라 물가를 생각할때... 열받을 수밖에 없는 거다... 게다가 식당 메뉴판을 보니 9유로가 제일 비싼 메뉴다... 물론 우린 메뉴판을 읽지 못한다... 시식해보라던 수프에 값을 매겼다... 점점 깨닫게 되는 것, 이탈리아 서남부 음식은 정말 맛없다. 그 시작을 여는 식당이었다.



식당에서 황당했던 일화를 적다보니 생각나는것. 폴리냐뇨에서 점심 먹으러 피자집에 갔는데, 비건이라고 하고 앉았더니 테이블을 세팅해주곤 메뉴판을 펼쳐보이며 손짓으로 물을 시키라는게 아닌가. 물부터 시키라는 말인줄 알고 앞의 피자 메뉴를 가리키며 vegan? 하니 메뉴판의 모든 페이지를 손으로 훑어보이며 no vegan 했다. 그리고 다시 마지막 페이지에서 물을 가리키며 vegan. 처음엔 황당해서 믿기지 않았는데 아무튼 나와서 어이없다며 한참 웃었다.

아무튼 그래서 식당을 나왔는데 영이가 가방을 뒤적대더니 보조가방에 소중히 들고있던 돈을 잃어버렸다는게 아닌가. 아무리 찾아도 정말로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가 훔쳐갔을만한 확률은 전혀 없고(오래된 빵봉투에 빵처럼 들어있었다), 버스에서 다른거 꺼내다가 떨어뜨린게 아닐까 싶었다.

그럴 수 있지, 하는 말로 영이를 달래며 숙소로 가서 체크인 하고, 근처 과일가게에서 체리 1kg과 수박을 샀다. 낮잠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10분만에 다 사야한다고 영이는 슈퍼마켓에 가고 (기분전환용 아이스크림 사러) 나는 과일가게. 더듬더듬 이탈리아어로 열심히 말하려는 나를 누구도 답답해하지 않고 오히려 너무나 스윗하다. 가격을 물어볼줄은 아는데 답을 해줘도 모르는 나...

1.6유로에 피스타치오&바닐라맛 비건 아이스크림을 한통 사서 마구 퍼먹고, 씻은 체리를 들고 역시 구글맵으로 대충 찍어 찾은 근처 해안가 마을로 떠났다. 거의 무슨 U자형 커브 뿐인 깎아지른 절벽의 해안 도로를 커다란 버스가 마구 달리는데, 길이 너무 좁아서 중앙차선은 완전히 무시한다.(옆 차선의 가드레일을 끼고 커브 돌아버린다.) 그러다가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살짝 옆으로 비켜주되 속도는 유지한다. 진심으로 황천길 가는줄 알았다. 작년 겨울 발리에서 엔젤 빌라봉 가는 길, 비포장 도로를 언제 분해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오토바이 타고 달리며 ‘진심 엔젤 되겠다’고 생각한 이후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근데 와중에 가는 길이 너무 아름다워서 이정도라면 가치있는 순간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천길이랄까.


목숨걸고 도착한 챈타라라는 마을은 아말피 가는 길에 있다. 아말피 가는 길의 해안 도로를 끼고 작은 마을들이 엄청 많은데 그 중 하나다. 도착하자마자 바다로 뛰어드는데, 이곳 바다는 물살이(보통 ‘물고기’라고 불리는 해양 생물을 지칭. 해양 생물이 그 자체로 ‘고기’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고민으로 생긴 단어다. 해양 생물은 왜 생명 그 자체로 존중받지 못해 인간의 시각에서 ‘고기’라고 불릴까?) 가 엄청 많다. 물이 맑아서 바닥까지 다 보이는건 당연하고, 온갖 물살이들이 무리를 이뤄 쏘다니는게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보인다. 얼마전, 현대 동물 살해를 목격하러 정기적으로 도살장을 방문하는 서울 애니멀 세이브의 물살이 비질(목격 활동을 이야기한다) 후기를 읽고 나 또한 도로가 슈퍼 진열장에 죽어 말라 비틀어진 물살이의 얼굴과 표정이 드디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다(내가 ‘비건’식습관을 시작할 때는 포유류에 공감해 ‘육류’와 소젖, 닭알을 거부하면서 물살이에는 공감하지 못해 가장 늦게 끊었더란다. 그러다 결국 끊는 순간까지도 생명에 대한 공감보다도 환경문제를 먼저 들었다. 그만큼 물살이는 우리의 삶에서 생명체이기를 너무나 부정당하는 존재다) 그래서인지 바다에 가면 항상 볼 수 있는 그들인데도 오늘따라 다르게 와 닿았다. 바위에 배를 긁는 걸 보고 웃다가 슬펐다가, 무리지어 지나가는걸 보고 놀라워했다가 슬펐다가.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은 여기다.


그리고 또 깨달은 것은, ‘여기’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 아주 작은 배들이 지나다닐 때에도 크게 생기는 조류에 그들은 자주 휩쓸렸다. 바위에 붙어 다같이 밥을 먹다가, 자연스럽지 못한 조류가 일면 저멀리 떠내려가 다시 힘들게 돌아와야 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조류의 근원을 찾으면 아주 작은 배가 저 멀리서 지나가고 있었다. 비거니즘은 결국 환경문제에 연결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던 나는 이제서야 직접 깨달았다. “수입품을 아예 안쓰고 살아야 할 것 같아.”라고 자신없게 말했다. 동료 비건들이 말하던 자급자족의 삶이 생각났다.


수영을 하고 물가 바위에 앉아 뜨겁던 햇빛이 사라지고 마을 전체에 그늘이 드리워질 때까지 오고가는 물살이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곳에 대해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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