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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Jul 05. 2019

Happy birthday to me in Napoli

2019.06.29


며칠 일기를 밀렸는데, 대충 즐거운 날들을 보냈다고 하자(그렇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딱히 중요하진 않고 중요하게 생각하며 부담 받고 싶지도 않은 날. 누가 생일을 그렇게 중요하게 만들었는지. 그냥 태어난 날로부터 1년, 2년 흘러 24번째 해일 뿐인데. 아무튼 이번 생일은 영이와 이탈리아다. 작년엔 호주였고, 재작년엔 페미니즘 캠프였고, 또 그 전엔 포항이었다. 신기하게도 생일마다 어딘가 새로운 곳에 있네.

그래도 생일엔 뭔가 해야한다는 의무감같은게 떨쳐지지 않아서, 오늘 뭘 할 건지 영이와 열심히 찾아봤다. 지금 머무르고 있는 살레르노 위 폼페이는 정말 작은 관광도시고, 기차 타고 삼십분 거리인 나폴리로 이동해 그간 가난해 못먹던 비건 코스요리를 먹기로 했다. 이탈리아는 어느 식당을 가도 기본적으로 코스요리를 판다. 한국처럼 특별히 고급진 식당에 가야만 파는것도 아니고, 코스가 정해져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냥 메뉴판에서 전채와 메뉴 1, 2, 디저트를 알아서 골라먹는 형식이다. 이런 곳에 와서 코스요리 한번 못먹어보고 떠나면 너무 슬플것 같아 좋은 핑계를 찾았다.

언제나처럼 날씨가 좋았고, 나폴리 가는 길의 창밖은 아침부터 수영하는 사람들로 넘실대는 해변으로 아름다웠고, 식당이 있는 산타루치아(교과서의 그 산타루치아가 맞다0에 도착했는데 별 기대 없던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왜 그렇게 산타루치아, 산타루치아 노래를 불러댔는지 한번에 이해했다. 그럼에도 왜인지 식당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너무 안좋아서, 이 상태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그게 맛있을까 싶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웃고 있었다. 왜 안좋았고 어떻게 풀렸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게 이탈리아다.

에피타이저는 왠지 또 돈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생략. 생일인데도 에피타이저 하나를 못 시킨다. 그래도 평소에 못 먹은 비싼 음식을 시켰는데, 나는 세이탄, 퀴노아 버거, 비건 소세지, 그리고 야채들을 구운 그릴 음식을 먹었고 영이는 동유럽식 라자냐 같은 음식인 무사카. 각자 와인을 한잔씩 마셨고 디저트로 티라미수와 치즈케이크를 먹었다. 당연히 모두 비건. 리뷰에서 엄청 특별한 맛이라고 해서 온건데 맛있었지만 사실 엄청 특별한 맛이라고 생각하진 않았고, 다만 티라미수는 진짜였다. 역시 이탈리아가 잘하는건 커피와 젤라또. 티라미수의 커피향이 깊게 은은하고 부드러운 비건 크림과 커피 머금은 시트의 촉촉함이 또 한 몫 했다. 디저트를 먹을 때는 이미 심히 취해서 계속 와하하 웃으며 머리를 부여잡고 머리아파! 머리아파! 했더란다. 웨이터가 그런 우리를 보고 웃고. 테이블의 작은 화분에 팁을 올려놓고 나오며 팁은 화분에 숨어있어! 하고 웨이터와 웃음을 교환했다.



밥을 먹으면서 계속 이따가 우리 옷벗고 수영하자, 하며 킬킬댔는데 막상 나와서 바로 앞의 방파제에 서니 1. 산타루치아의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상의탈의를 할 용기가 안났고 2. 다이빙할 용기도 안났다. 우리도 기분 내면서 상의탈의 하고 수영하고 싶다고! 주변의 수영하는 남자들은 살색의 물결인데 우린 왜 그렇게 눈치를 봐야 할까. 억울함을 토로하며 대범하게 행동하려다가도 결국 눈치를 봐버렸다. 결국 나는 수영복이나 다름 없는 나시를 입고 나와서 바지만 벗었는데, 다이빙을 못해서 주변 사람들한테 여기 깊냐고, 다이빙 하다 머리 박을 수도 있냐고 징징대며 물어봤고 영이는 원피스를 입어서 옷을 벗을까 말까만 한참 고민하며 옷자락을 쥐었다 놨다 했다. 술도 좀 취했겠다 간지나게 뛰어가면서 옷을 훌렁 벗어 던지고 다이빙하는 우리를 상상했는데 결국 우리는 노간지였다. 한참이 지나서 결국 내가 다이빙을 했고 그런 나를 보고 영이는 부러움에 옷자락을 반쯤 풀어 헤친 채 또 쥐었다 놨다. 바다에 몸을 담근 나는 일부러 영이 곁을 자유롭게 맴돌며 정작 나는 안 벗고 벗어라! 벗어라! 하며 낄낄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만 하다가 영이가 원피스 오픈과 동시에 빠르게 뛰어들었다. “추워!!!! 시원해!!!!” 그 시원함은 해방감이 +150%로 총 250%의 행복이 되었다.

놀랍게도 사람이 그렇게나 많았는데 아무도 우릴 쳐다보지 않았다. 거의 본능적으로 눈치를 보며 틈틈이 주위를 둘러봤는데 그 누구와도 눈 마주치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꽤 가부장적인 나라라 옷을 벗는 순간 시선이 쏠리고 휘파람 엄청 당할줄 알았는데 그런게 전혀 없다. 그렇게 우린 억울해졌다. 이렇게 쉬운거였어? 이렇게나 고민했는데? 심지어 불법인지 검색도 했는데! 그래서 아예 수영을 마치고 올라와 팬티만 입고 낮잠도 잤다. 여전히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다. 앞뒤 양옆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니지만 상관 없다는거. 이젠 이탈리아 어디서든 괜찮을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 용기를 넓혀간다.
수영을 하고 너무나 상쾌한 기분으로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바닷길을 따라 걸었다. 마트에서 맛없는 이탈리아 맥주와 (왜 와인을 그렇게나 마시는지 잘 알겠다. 여기 맥주는 그냥 맛이 없다) 오렌지를 사먹으며. 병목을 한손에 잡고 덜렁덜렁 흔들며 걸어다녔는데 아무도 길거리에서 맥주를 마시지 않아서 엄청 방탕한 관광객이 된 것 같았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 이탈리아의 볕 만큼이나 고조된 마음. 이탈리아의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나면 온 몸이 염전이다. 사박사박 움직일때마다 떨어지는 볕에 구운 소금(영이의 반삭 머리칼은 한올 한올 끝이 하얗게 변했다). 즐거운 날들.


어느정도 소화가 되자 또 찜해놨던 비건 디저트집으로 직행했다. 테이블 세개가 앞뒤로 서로 붙어있는 작은 가게다. 메뉴가 엄청 많아서 추천을 부탁했더니 유쾌한 직원이 메뉴를 하나하나 다 설명해주는데 뭔가 꽁트스러워서 드라마 보는 것 같았다. 결국 이탈리안 즉석 케이크와 까놀리(동그란 웨이퍼같은 얇은 과자에 크림과 초콜렛을 채운것), 식사용 크레페, 초콜릿과 헤이즐넛 에스프레소를 시키고 먹다가 맥주를 하나 시켰는데 메뉴 나오는 순서가 엉망진창이라 너무 웃겼다. 에스프레소를 원샷하고 나니 케이크가 나왔고, 케이크와 까놀리를 먹으며 맥주를 마셨고, 디저트를 다 해치우고 난 후 손바닥만한 식사용 크레페(짠것)를 먹었다.


숨막히게 배부른 상태에서 폼페이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고,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폼페이의 작은 광장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 폼페이는 관광도시지만 대부분 나폴리에서 숙박하고 폼페이는 낮에나 잠깐 들르는 식이라 밤엔 항상 사람 사는 냄새가 진하다.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광장 안팎을 밤새 맴돈다. 무리를 지어, 뭔가를 찾는 것처럼. 작년 우연히 여행했던 알바니아의 호숫가 작은마을이 생각나는 광경이다. 저녁 7-9시엔 동네 모든 사람들이 차려입고 나와 호숫가를 여러번 산책하는 전통이 있는 곳. 매일 같은 이웃, 친구, 가족들을 여러번 만나 인사하고 헤어지고 하는 곳이다. 한시간 넘게 같은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는 우리가 그들도 신기했는지, 주위를 맴돌던 몇몇 애들이 갑자기 우리 앞으로 뛰어와 무릎을 꿇더니 신발끈을 묶고 도망간다. ???. 오늘의 작은 웃음 하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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