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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Dec 05. 2018

여행이 배로 만드는 것들

내가 떠나오기 전 일년 반동안 가르쳤던 과외돌이는 내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험에서 종종 가장 쉬운 문제를 하나씩 틀려오곤 했다. (학원 다닐 때는 50점 받아오던 애가 나랑 수업하고 나선 항상 80, 90점 받으니 우쭐해서 그깟 한문제는 별거 아니라는 듯 굴었고, 나는 항상 '이 점수는 니가 아니라 내가 받은거다 짜식아' 하고 웃었다.)


한번은 지문을 읽고 화자의 감정을 추론하는 문제가 나왔는데, 화자가 기대하던 가족여행을 떠났다가 몸이 아파 숙소에 홀로 남았다는 이야기. 과외돌이는 외로움을 선택했는데 답은 다른거였다. 이야기에 맥락이 조금 더 있어서 강사 입장에서는 다른 답이 무조건 맞는것처럼 보였는데 잘 기억이 안난다. 아무튼 자기가 딱 저 상황을 겪어봤는데 너무 외롭더라, 다른 감정은 생각할 수 조차 없었다, 하고 해명하는 과외돌이를 보고 한참 웃었다. 그러게, 학교 선생님은 왜 모두의 감정을 통일시키려는 걸까? 빅브라더 출신이신가?(당시 빅브라더 드립을 치진 않았지만 아마 못 알아들었을 것이다...)


내가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간다면 저 문제를 마주했을 때 외로움을 선택할 거다. 여행중의 병치레(병은 아니지만)는 왜이렇게 외로운걸까, 상처보다 더 깊고 위험한걸까, 분명 꼬멨는데 다시 벌어져 피를 뚝뚝 흘리며 그 깊은 살 안쪽으로 내 몸 전체를 삼켜버릴것 같은 두려움. 새롭게 다가오는 무력감과 한쪽으로 콸콸 흘러나가는 모든 일에 대한 의지. 물을 뜨러 가거나 샤워를 하는 것 조차 귀찮아.


이럴 때 가장 위험한 것은 나다. 감정에 잠식하도록 자신을 부추기는 나. 일어나서 블라인드를 올리고 머리라도 자르러 가라고 나를 도우려는 나보다 거대한 나. 겨우 손을 뻗고 손가락을 움직여 음악을 틀고 글 쓰기에 편한 자세를 꼼지락 꼼지락 만들어대는 나.


거의 일년째 플레이리스트가 고정이다. 음악 하나를 들으면 2월 어느 5시의 웃음, 3월의 어느 밤 이불 속의 온기, 5월 태국 야간버스의 불규칙적인 흔들림, 7월 기차 창밖 마케도니아의 초록 강 뭐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그 순간의 색과 냄새와 온기, 빛과 어두움까지 모두 함께 몰려와 공간을 가득 채운다.


쉼표를 유난히 많이 쓰는 전의 글쓰기 습관이 돌아왔다. (방금 여러개 지웠다.) 안 쓰려고 노력 많이 했는데 글의 호흡보다 무작정 풀어놓는게 더 중요한 날들은 이렇게나 무의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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