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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회전문가 Oct 17. 2021

할머니께

사랑하는 나의

할머니. 얼마 전 남아있던 앞니마저 몽땅 빠졌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어요. 같이 간 양고기 집에서 저보다 많이 드시던 할머니가 이제 국만 잡수신다는 말을 들으니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나요. 아직 할머니와 먹고 싶은 것,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힘을 내서 조금만 더 천천히 늙으면 안 돼요? 


고백할 게 있어요. 지난번에 놀러 오셨을 때 빨갛게 염색한 제 머릴 보고 타박하셨을 때, 제가 매일 딸기 한 팩씩 먹어서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한 거 사실 거짓말이에요. 어쩜 좋으냐고 저를 걱정해주는 할머니가 너무 귀엽고(어른께 귀엽다는 표현을 쓰는 게 무례하단 걸 알지만 대체할 표현이 없어서 그런 거니 이해해주세요) 웃겨서 장난치고 싶었어요. 이건 비밀인데, 저 김 많이 먹어서 머리가 다시 까매졌어요. 이건 진짜예요.


저는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으면 기분이 너무 좋아요. 꼬집으면 꼬집은 대로 유지되어있는 피부가 꼭 귀여운 아기 불독의 주름진 가죽 같다. 예의도 없고 철도 없는 제가 할머니의 손과 팔을 정신 사납게 만져대도 신경 쓰지 않고 옛날이야기를 꺼내는 할머니가 좋아요. 그러니까 빨리 건강해지셔서 제 손을 잡고 얘기해주셔야 해요.  


다시 보고 싶으니까요. 당신의 자랑스러운 자식들을 자랑할 때면 생기가 띄는 그 눈동자를. 우리 애들은 뭐든지 다 1등이었어. 라며, 1등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하는 할머니의 입을. 

그 표정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붕 떠서 아주 먼 곳으로 날아가요. 아주 먼 - 미래의 나에게로.


함께 놀던 친구들과 옛 연인, 10년 전 젊고 바쁘던 엄마 아빠, 회사에서 만나게 된 동기들과 동료들, 운동으로 친해진 인연들, 방문 앞에 앉아 가족들을 바라보던 할아버지, 우리 가족이 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프라이팬에 삼겹살을 굽던 할머니, 모이면 늘 시끌벅적한 친척들, 나만 보면 반가워서 울던 후배. 언젠가 이 사람들도 늙게 되겠죠. 


그중엔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정도로 미운 이들도 있어요. 한때 죽여버리겠다고 저주했던 사람, 저 사람만큼은 행복하게 살지 않았으면 바랬던 사람, 나를 괴롭게 만들고 울게 한 사람,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 만든 사람, 혹시나 우연히 라도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 사람, 사람.


모두 죽음 앞에선 한없이 약해질 사람들이죠. 우리 언젠가 늙어 이빨이 빠지고 주름이 새겨지겠죠. 할머니도 젊은 날이 있었던 것처럼, 저희도 언젠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겠죠. 찬란했던 기억을 수없이 되풀이 말하는 것으로 하루를 채우고 가끔 그리운 이를 떠올리면서, 아프지 않게 죽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될 거예요.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어쩐지 너그러워지더라고요. 그저 걷는 것마저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한 사람이 되어버린 나와 남을 떠올리면 모든 게 부질없게 느껴지고 측은해져서 미움도 분노도 원망도 숨이 죽어요. 어차피 모두 한 때에 불과한 것을 한 때라면 굳이 품고 있지 않아도 되는 것을 너무 오래, 많이 쌓아두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해요. 가볍게 살아도 날기 힘든 삶인데 뭐가 그리 아까워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것인지. 떠오르는 이들의 얼굴에 죽음을 붙여보는 것만으로 잠시 어른이 된 것만 같아요.


그러니까 할머니. 조금만 더 옆에 있어주세요. 제가 좀 더 클 때까지, 할머니가 없어도 어른이 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다음 달에 뵈러 갈게요. 그때까지 밥 잘 챙겨 드시고 건강하셔야 해요. 할머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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