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턴트로는 채울 수 없어
늦은 퇴근을 하고 집에 오면 가장 먼저 냉장고를 향해 돌진한다. 없다. 문을 닫는다. 몇 분 뒤 다시 연다. 없다. 방금 봐놓고도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여러 번 또 냉장고 문을 여는 건 혹시나 미처 보지 못한 음식이 있지 않을까라는 작은 희망 때문이건만 역시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먹을 만한 게 없다.
배가 고픈 건 아니다. 밥을 먹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늦게까지 일한다는 핑계로 후식까지 챙겨 먹은 탓에 속이 살짝 더부룩하다. 야식을 먹어봤자 후회할 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입이 심심하다. 적당히 짜고, 적당히 매운 무언가- 나의 이 알 수 없는 허기를 달래줄 무언가를 먹고 싶다.
그 '무언가'에 해당하는 건 대부분 인스턴트 음식이다. 빠르고 간편하고 자극적이라 맛있기까지 한 인스턴트 음식 중 갑인 라면은 종류가 왜 이렇게 많은 것이며, 토핑은 또 왜 이렇게 다양하고, 자극적인 음식을 더 자극적이게 만드는 레시피는 왜 이렇게 차고 넘치는 건지! 게다가 같이 먹으면 더 맛있는 사이드 메뉴까지 냉동실에 그득그득하다. 내가 이걸 왜 사놔 가지고! 근데 기쁜 마음이 동시에 드는 건 왜일까.
결국 냄비에 물을 올리고 냉동실에서 튀김만두를 꺼내 에어프라이기에 돌린다. 집안에 가득 찬 기름 냄새와 라면수프 냄새가 향기롭다. 언젠가 냉동실에 다듬어 넣어두었던 파와 청양고추를 꺼내고, 냉장고 구석에 있던 슬라이스 치즈의 유통기한을 확인한다. 어머나, 기한이 얼마 안 남았네? 어쩔 수 없이 먹어야겠군. 김치는 요만큼 덜으면 되려나. 볼 안쪽에서 찌릿하고 침샘이 돈다. 아 맞다. 넷플릭스. 빠르게 화면을 켜 볼거리를 찾아 헤맨다. 어디보오자~ 보올~만한 ~게~ 뭐가~ 있으려나~
젠장. 아직 볼만한 걸 찾지 못했는데 라면이 완성되었다. 일단 급한 대로 파와 청양고추를 투척한 뒤 소매를 주욱 늘려 손잡이를 잡고 라면을 옮긴다. 에어프라이기에서 만두도 꺼내고, 치즈와 김치도 챙겨 식탁에 앉는다. 방금까지 허전했던 마음이 채워지는 기분이다. 역시 야식이 최고야!
라고 생각했던 마음은 왜 매번 라면과 함께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이제 내게 남은 건 툭 튀어나온 배와 후회뿐이다. 그냥 잠이나 잘 걸. 지금 먹어버렸으니 최소 1시간은 뒤에 자야 (그나마) 역류성 식도염을 예방할 수 있건만 왜 이렇게 졸음이 쏟아지는 건지. 벌써 새벽 2시네. 지금 안 자면 내일 피곤할 텐데. 아 모르겠다. 일단 자자.
이런 날은 적어도 일주일에 2-3번 반복된다. 먹고 후회하는 밤이 반복될 때마다 자기혐오도 점점 늘어가지만 야식의 유혹에 매번 넘어가고 만다. 오늘은 정말 먹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밤이 되면 찾아오는 허기에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부엌을 어슬렁 거렸더니, 결국 몸무게 앞자리가 바뀌고야 말았다.
당연히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겪으니 충격적이다. 살면서 이런 몸무게를 본 적이 없는데. 이게 정말 내 삶... 아니 살의 무게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앞으로는 정말 야식을 먹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한다. 그런데. 야식 끊는 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야식을 본격적으로 끊으려면 '나는 왜 야식을 끊지 못하는가'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나는 왜 이렇게 의지가 없을까'에서 '역시 나는 안돼'로 흘러 '에라 모르겠다 그냥 먹고 싶은 거 먹으면서 살자'로 끝나는 루트를 잘라낼 수 있다.
나의 폭식 원인은 허전함이었다. 여기서 허전함은 결단코 위의 공복감이 아니다. 그랬다면 음식물이 위를 채웠을 때 후회하는 게 아니라 만족감이 생겼어야 한다. 튀어나온 배일지라도 기분 좋게 두드리며 잠자리에 들어서야 한다. 허나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먹기 전보다 더 늘어난 몸무게와 허전함을 끌어안은 채 침실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야 했다.
밤마다 찾아오는 허기는 내면의 공복감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유튜브 숏츠로 날린 내 시간. 명의만 내 것이지 결정권은 모두 타인에게 있던 내 하루. 좋아하는 일보다 해야 하는 일들을 해치워 나가기에 바쁜 내 인생. 그리고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관하고 모른 척했던 스스로에 대한 분노로 만들어진 허기와 갈증. 그것을 눈 가리기 아웅 식의 인스턴트 음식으로 채우려 했으니, 쌓이는 건 하루의 마지막까지 내 뜻대로 컨트롤하지 못했다는 불만감과 내장지방. 그리고 숙변일 수밖에. 어우. 내 똥꼬 찢어지겠네.
이러다간 정말 병원 신세를 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게 당뇨던, 식도염이던, 위궤양이던, 치질이던, 우울증이던 아무튼 무슨 병이 생기긴 생길 것이고, 그럼 나는 현대 과학의 저주로 유병장수하겠지. 그렇지 않기 위해선 지금부터 제대로 허기를 채워야 한다.
허기를 채우는 법은 요리 유튜브처럼 간단하다. 쉬워 보이지만 막상 하려면 귀찮고 어렵다. 그래도 해야 한다. 재료가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있는 재료로 대체하거나 인터넷 주문이라도 하는 성의를 보이자. 그럼 내일부터는 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스스로를 오마카세 식당의 주인이자 손님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아주 비싸고 좋은 재료들을 준비해 '저 손님이 즐겁게 식사를 마치려면 어떤 메뉴를 준비해야 할까' 고심하는 시간을 갖자. 그것은 독서가 될 수 있고, 일기가 될 수 있고, 공부가 될 수 있고, 운동이 될 수 있고, 뜨개질이나 건담 조립이 될 수 있다. 만약 그게 요리라면? 괜찮다. 인스턴트가 아닌 신선한 재료들로 (기왕이면 정성을 아주 많이 들여야 하는 메뉴로) 조금만 해 먹던가, 내일 먹을 반찬을 만드는 것으로 대신하자. 핸드폰만 안 하면 된다. 쟤도 하루종일 나를 휘두르느라 힘들었을 것이니 쉬게 두자. 내 시간은 내게 돌려주자.
그리하여 오늘은 카페인이 없는 차를 우려 책상에 앉았다. 그리곤 시간이 나면 읽으리라 사두었던 책을 펼쳤다. 야식이 습관이 되어버린 몸이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을 치지만 단호해져야 한다. 우는 아이의 생떼를 다 받아준다면 버릇이 없어진다. 버릇이 없어진 아이는 당장은 편할지언정 커서 받아주는 사람이 없어지는 순간 힘든 삶을 살게 된다. 나를 키우는 일에 책임과 결과는 내게 있다. 잊지 말자. 외로울 때 연애를 시작하면 안 되고 배고플 때 장 보면 안 된다는 말처럼, 허전할 때 음식을 먹지 말도록 하자. 어차피 그 허기는 인스턴트로는 절대 채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