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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회전문가 Jun 07. 2023

Rrrrrrr 발음 연습을 해보는 거야

때로는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는 게 낫더라고

밑도 끝도 없이 우울하고 허망함이 밀려오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다. 생리처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이라 이제는 이유를 찾으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왔구나- 하고 덤덤하게 감정을 맞이할 뿐. 대게 이 시간은 견디는 것으로 시작해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냐는 외침과 몸부림으로 끝나곤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새로운 우울 전환법을 찾아냈으니까.


뜸 들이지 않고 말하겠다.

그것은 바로 ‘Rrrr’ 발음을 연습하는 것이다.


1년 전, 1년 7개월간의 교정을 마치고 마지막 유지장치를 붙이는 날. 의사 선생님은 내 입을 아주 오래 찢었다. 5분이면 끝난다던 작업은 30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고, 가뜩이나 작은 입이 점점 한계에 도달해 파르르 떨려왔지만 차마 그를 원망할 수 없었다. 그가 질질 끌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나의 혀 때문이었으니까.

아무리 눌러도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는 혀를 수십 번 누르던 선생님은 보조 1명을 보조 2명으로 늘려보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셨다. 허나 내 혀는 강했고 참고 참던 선생님은 조용히 말씀하셨다.


“혀가... 조금 짧으셔서... 잘 안되네요.”


와우. 마치 실수로 녹음된 음성파일로 내 목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내가..? 제가요.. 저요..?


한 번도 생각해 보거나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혀 짧은 소리도 내지 않고, 발음이 안 되는 단어도(한국어 한정) 없었으니까. 게다가 난 휘파람도 잘 불고, 혀도 동그랗게 잘 말 수 있단 말이야!


하지만 이건 반박할 여지도 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 의사 선생님은 하루에 최소 10명 이상 진찰을 보고 있고, 그럼 경력이 3년만 돼도 10,950명의 입안을 들여다본 사람이니까. 그러니 내 혀는 짧은 게 맞다.


그 사실을 마주하자, 하나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내가 ‘Rrrr 발음’을 못한다는 사실. 그게 짧은 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혀가 짧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머리에 느낌표가 떴다. 어쩌면! 여태껏 Rrrr를 못했던 이유가!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동안 잠잠하던 우울의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프랑스어는 못하겠구나... 블랙핑크 노래도 못 따라 부르겠네... 내가 말을 빨리 하면 단어가 뭉개지는 것도 혀 때문인가? 그래서 영어도 R과 L발음이 어려운 건가? 나는 왜 혀가 짧아서 못하는 게 생기는 거야. 나는 왜 잘하는 것도 없으면서 못하는 것만 이렇게 많고 -'


잡생각은 주제를 몰라서 도통 2절, 3절로 끝나는 법이 없기에 결국 유튜브에 'Rrrr 발음하는 법' 을 검색했다. 혀에 힘을 빼고~약간 입술을 벌린 후에~ 공기를 불어넣으면.... 그렇게 30분 넘게 연습했지만 끝까지 Rrrr발음은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한 가지는 성공했다. 그것은 바로 우울을 잊어버리는 것!


Rrrr 발음에 집중하는 동안 우울이고 잡생각이고 뭐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이 지구에 존재하는 건 나 그리고 내 혀(혀는 나와 한 몸이지만 그때만큼은 나와 다른 인격체로 느껴질 만큼 멀고도 이질적이게 느껴졌다...)뿐. 그동안 쉽지 않았던 우울의 늪에서 발을 빼는 일이 얼떨결에 해결되는 경험이었다.


사랑은 또 다른 사랑으로 잊힌다고 했던가. 감정은 다른 감정으로 덮을 수 있었다. 어차피 해결되지 않을 감정이라면 다른 감정. 기왕이면 긍정적인 감정으로 묻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일 것이다. 고로, 우울할 땐 Rrrr 발음을 도전해 보자. Rrrr 발음이 된다면 특이한 손동작을 찾아내 연습해 보는 등 혼자 아무 때고 꼼지락꼼지락 할 수 있는 동작을 정해 놓는 것만으로 '난 언제든 우울을 잊을 수 있어'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꿀팁 공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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