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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시 Apr 13. 2023

산책


 흐린 구름이 가득한 날입니다. 봄에 부는 바람은 겨울바람과 조금은 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따스함이 어설프게 섞여 볼을 베고 스치는 것이 아프게 느껴져 낡은 카디건을 꺼내어 입고는 소매를 꽉 움켜쥐었습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는 감정들이 차오를 때면 벽에 기대어 숨을 골라야 했습니다. 누군가 다가와 괜찮냐고 물을까 두려워 답을 미리 정해두었는걸요. ㅡ 괜찮습니다. 전 날씨 같은 기분을 안고 살아요. ㅡ 지하철 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우울을 보며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타인에 의해 열고 닫히는 철문이 부럽습니다. 제 마음도 누군가 열고 닫아주었다면 이렇게 고장 날 일 없었을 텐데.

 

그래도 집에는 가야 하니까요. 처음 보는 모두가 제 비루함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부끄러운 기분에 도망치듯 역을 빠져나왔습니다.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과 휘어진 가로등 불빛을 아래 골목 어귀에 버티고 선 오래된 만두 집과 낡은 부띠끄 집을 지나쳤습니다. 이 방향이 맞을까요..? 글쎄요, 중요한 건 걷고 있는 것인걸요. 부디 집이 아니더라도 어딘가 도착하길 바라며 제법 씩씩하게 걸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담벼락 아래에서 만난 고양이는 그만 돌아가라는 듯 한심하게 절 바라보고는 야옹 ㅡ 하곤 사라졌습니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 바라보고 나서야 발걸음을 뗄 수 있었습니다. ‘감정을 무단 투기 하지 마세요’라고 쓰여진 낡은 벽보가 붙은 담벼락을 뒤로

 

아쉬워요. 저는 이제 막 무언가 하기 시작한걸요. 당신만큼은 제 일탈을 함께 해주실 거죠?

 

모든 불빛이 잠든 세계에서 선명히 남은 이름들을 보았습니다. 설국 같은 백지 위 붉은 실로 뒤덮인 것들을 보고는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살갗이 찢어지는 것도 모른 채 그 위에 누웠습니다. 가쁜 숨을 내쉬곤 온몸에 실이 휘감기길 바라며 구르고 또 굴렀습니다. 점점 혀 끝에 맴도는 이 감정들을 활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무뎌지는 기억들처럼 쓰고 읽는 능력 또한 소멸해 버리는 걸까요. 글로써 살아가고 싶습니다. 위태롭게 매달린 활자들을 보듬어 끌어안고 살아가려 합니다. 해묵은 기억과 빛바랜 감정이 무엇이라고 이렇게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지, 손가락 뼈 마디새로 스며든 아픈 것들을 보며 당신만큼은 이 응달 드리운 세계에 발 붙이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래도 이제 알아요. 세상은 제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당신과 제가 마주할 줄 그 누구도 몰랐으니까요. 과실은 반반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남아있는 이름 석자 끝을 바라보다 보니 불현듯 기억났습니다. 아주 솔직하게 고백하면 제가 조금 더 좋아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걷기 시작해야죠. 잿빛으로 얼룩진 실을 붙잡고 사랑한다고 말해야죠.
설국 속을 헤매다 얼어 죽어도 좋습니다. 바보 같지만 저는 여즉 글로써 살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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