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같아요
12주의 여정이 끝났습니다. 사회 실험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할까요?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값진 교훈을 두 개를 얻었습니다. 하나는 시간이 참 빠르다는 것, 또 제가 얼마나 오만하게 살았는지에 대하여.
날 때부터 강아지처럼 사람들을 좋아해 졸졸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부르면 가고 안 불러주면 섭섭해하는 그런 사람. 약속은 캘린더에 꽉꽉 차있고, 이제 사람 이름 외우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구별하고 판단하는 데는 도가 텄다고 착각하며 살았던 겁니다. 제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잊어버린 채.
MBTI가 지금처럼 유행하는 이유는 자신을 설명하고자 하는 사람과 설명하고 싶지 않은 사람 모두를 만족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를 늘 괴롭히던 ’ 나를 표현해주세요 ‘라는 질문에 ”저는 0000입니다 “ 한마디면 되니까요. 누군가는 그 알파벳 4개로 밤을 새워 상대방을 생각하고 또 누군가는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의 한숨을 쉴 테니까요. 얼마나 재밌나요. 어느새 우리는 단 알파벳 4개의 조합으로 상대방을 그려내는 바보가 된 겁니다.
지난 12주 동안 MBTI를 말하지 않기로 약속한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마지막으로 모여 자신의 MBTI를 공개하기로 한 날 내심 자신 만만 했습니다. 사람들을 파악하는데 저보다 도가 튼 사람은 없으니까요.
어떻게 됐냐구요? 10명이 넘는 사람들 중 제가 맞춘 사람은 딱 한 명. 제 MBTI를 맞춘 사람도 단 한 명이었습니다. 참 바보 같죠 다시 생각해도. 만약 상대방이 제가 싫어하던 MBTI 유형의 사람인지 알았다면 지난 12주간 그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었을까요?
들불처럼 번진 유행 따라 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건넨 질문을 후회합니다.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어쩌면 그동안 색안경을 손에 들고 물어보지 않았을까요? 상대방이 INTP이던 ESFJ 던 무슨 상관이라고 그 수많은 인연을 이야기도 채 나누기 전에 마음속에서 놓아버린 걸까요.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던 밤입니다. 모두가 떠난 자리를 정리 하며 맴버들의 MBTI를 적었던 종이를 쓰레기통에 버리곤 이제 이름말고 MBTI를 잊으며 살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더는 묻지 않겠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제 저도, 당신도 그 바보 같은 알파벳 4개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