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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그날 이후, 나는 다시 살아야 했다

무너졌지만, 다시 시작됐다

by 지화


※ 이 글에는 현실적인 폭력, 배신, 감정적 상처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읽는 분의 감정에 따라 불편할 수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 ※


시골에서 단짝 친구와 1~2년을 함께 지낸 뒤, 우리는 전주로 이사를 왔다. 보증금은 친구가 내주었고, 나는 월세와 공과금을 반씩 부담하기로 했다. 새로운 도시는 낯설었지만, 함께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전주에 막 도착했을 때, 단짝 친구가 말했다.

“생활비 부족한데 너 이름으로 대출을 좀 받아줄 수 있어?”


나는 망설였지만 결국 단짝을 믿고 내 이름으로 대출을 받았다. 친구는 “내가 갚을게”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훗날 나를 오래도록 괴롭히게 될 줄 몰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는 변해갔다. 평소엔 화장도 안 하고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피하던 아이였는데, 어느 날부터 진한 메이크업을 하고 짧고 딱 붙는 원피스를 입고 다녔다.

아마 처음 생긴 남자친구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친구가 예뻐 보였고, 응원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내 단짝이 아름다워 보였고,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친구는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남자친구가 집에서 자고 갈 거야, 오늘 밤은 네가 집 좀 비워줬으면 좋겠어.”


그 말이 하루 이틀 반복이 됐고, 나는 PC방, 찜질방, 처음으로 모텔에서 혼자 잠을 잤다. 아르바이트 두 개를 뛰고 나는 피곤한 몸을 끌고 집이 아닌 낯선 공간에 머무르는 밤들이 이어졌다.


어느 날은 내가 아르바이트하던 갓난아기가 있는 치킨집 사장님 부부가 나를 집에서 재워주기도 했다.


그런 날들 속에서 참다못한 나는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지내야 돼?"


그날, 단짝은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치킨매장에 찾아왔다.

짙은 메이크업에 짧은 원피스를 입고, 손에 현금 백만 원을 쥐고 있었다.


“보증금이야. 집에서 나가줘.”


그 말로, 우리의 우정은 끝났다. 나한테 그 친구와는 거기서 마지막이었다. 짐을 챙겨 급하게 구한 원룸은 먹자골목에 있었다. 하수구 냄새, 곰팡이, 바퀴벌레. 아무리 버텨보려 해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다른 동네로 이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가 찾아왔다. 시골 햄버거집에서 같이 아르바이트하던 여자후배랑 함께 내가 아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화장기 없는 얼굴, 펑퍼짐한 티셔츠, 청바지, 운동화. 나한테 너무 익숙한 단짝의 모습이었다.


흐느끼면서 용서를 비는 모습에 나는 아주 잠깐 흔들렸지만 나는 그 애를 지금 당장 용서하는 게 쉽지가 않았다.


시골에 있을 때 내가 장사를 하면 파트너는 당연히

이 친구였고, 같이 무슨 장사를 할지, 오픈 시기는 언제로 할지 등 여러 가지 계획을 하고 꿈을 키우면서 전주에 왔기 때문에 바로는 용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첫 남자친구에 이어서 첫 단짝 친구와도 이별을 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 앞으로 압류 서류가 도착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단짝이 갚기로 한 대출은 단 한 번도 상환되지 않았다는 걸.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돈도 없는 무일푼인 나에게 갚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단짝 친구라고 믿었던 그 친구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거짓이라고 생각하니까 제정신이 유지가 안 됐다.


절망 속에, 나는 소지품도 없이 집을 나왔다. 걸었다.

돈이 한 푼도 없다. 근처 아무 상가에 들어가서 구걸을 했다.


교회에서 보던 물건이 있던 미용실이었다.

나는 그날 오만 원을 빌렸다. 꼭 갚겠다고 한 오만 원이었다.

무엇을 믿고 그 어린 사람에게 큰돈을 빌려주신 건지.. 나는 아직도 그 돈을 갚지 못했다. 찾을 수가 없다. 어디에서 구걸을 한 돈인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 죽으러 바닷가에 가는 길이었다.


버스 안에서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기사님이 계속 대화를 시도했고 그렇게 경찰에 신고가 들어갔다. 나는 경찰서로 끌려갔다. 지문 조회로 아버지와 둘째 동생이 찾아왔고, 그제야 상황이 알려졌다.


둘째는 나를 향해 "미친년"이라 욕설을 퍼부었다.

결국 빚은 친할머니가 어렵게 모은 적금으로 정리했다. 시골에서 경찰서도 가고, 법률사무소에 자문을 구하기도 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다시 전주에 가라는 부모님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었다.


정리도, 회복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다시 전주로 돌아와 그 치킨집과 편의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나를 다시 받아주신 사장님이 감사했고, 열심히 일해서 민폐 끼친 거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치킨집 사장은 말했다.

“돈 많이 벌고 싶지 않아? 방법 있는데 내가 벌게 해 줄게.”

솔깃했다. 사장님한테 민폐 끼친 것, 친할머니가 변제해 주신 돈.. 나는 돈이 너무 절실했다. 사장님한테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일이 끝난 밤, 사장은 내 옆에 앉으라 했고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너를 만질 거야. 싫으면 싫다고 해. 그런데 이것도 못 버티면 큰돈은 못 만져.”


이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방법인가?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은 망설임 없이

윗옷 밑으로 손을 넣어서 내 가슴을 만졌고,

사장님의 손이 내 옷에서 나온 순간부터

나는 수치심과 눈물밖에 나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자취방으로 돌아왔고

울면서 먹고 있던 약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자살은 미수로 끝나고

그 일을 그만뒀다. 그 이후는 원룸에서 폐인처럼 지냈다.


그러다 아래층 미용실 원장님의 소개로 마트 사장님 부부를 만나게 됐다.

무슨 신의 장난인지, 그분들은 치킨집의 단골손님이었다.

내가 서빙하던 모습을 보고, “요즘 애답지 않게 착하고 씩씩하다"라고 하며 택시비라며 팁을 건넸던 다정한 분들이었다.


나는 그 손님들과 인연이 되어, 마트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일할 수 있었다. 마트에서 일하면서 나는 일상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다시 시작한 삶은 여전히 녹록지 않았다. 마음을 회복하기엔 시간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내 안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물음표들이 많았다.


왜 나는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그때부터 아주 조금씩, 내 삶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직은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지만, 내 안에 무언가가 자라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다. 작고 미약했지만 분명한 변화였다.


전주에서의 생활은 어두운 터널 같았지만, 그 끝 어딘가에 불빛이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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