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타이거 Jan 11. 2023

전역자의 편지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겠네~~

지금 가사를 보니 정말 격세지감이 느껴지지만 그때는 악을 쓰며 부르다 보면 정말로 진짜 사나이가 된 것 같았다. 왠지 모를 자부심이 추운 겨울 새벽 상의를 벗고 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것 같다.


무려 26년 전 1996년 10월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훈련소까지 함께 갔던 친구가 헌철이었는지 민식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었지만(따라올 애인이 없었던 건 분명하다) 힘들고 고생했던 순간들은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다.

최후방 부산으로 배치를 받아 훈련보다는 작업이라는 이름의 삽질과 낫질, 힘든 내무생활로 맞고 구르고 혼났던 기억들이 생생하다. 그러다 어느 정도 밥이 찼을 때쯤엔 '때리면 영창 간다'는 구호를 외치며 군의 조직문화도 변해갔다.

내가 선임이 되었을 때는 정말 군대가 편해졌다고 느꼈다(신기하게도 군대 갔다 온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함)

맞지 않는 전공과 학부라는 제도로 선배가 없어져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의미 없는 학교생활을 하고 있던 터라 최대한 빨리 입대를 신청했었다. 복학생 선배들을 봤을 때 2년 2개월이면 충분히 정신 차릴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사람이 바뀌는 건 절대 외부환경 탓이 아니라는 걸 그때 난 깨달았다. 결국 스스로의 동기부여가 없다면 일시적인 것일 뿐. 복학한 그 학기에 학사경고를 받았다. 변한 건 없었다. 여전히 공부는 적성에 맞지 않았고 내 미래에 대해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다.


군대에 있었던 2년 2개월이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그런 극한의 상황은 다시 경험하기 힘든 경험인 건 분명하다.

삶이 힘들 때 그 시절을 회상하며 내 안의 야성을 깨우려고 노력한다.

멋있는 사나이~많고 많지만 바로 내가 사나이~멋진 사나이~싸움에는 천하무적 사랑은 뜨겁게 사랑은 뜨겁게~

그래 무엇이든 뜨겁게 해야 멋있는 사나이지.

이제 나라 지키는 영광이 아니라 내 가족을 지키고 내 사랑을 지키고 나의 신념과 가치를 지키며 뜨겁게 살아가자.


기상나팔 소리가 시작됨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 음악이 끝나기 전에 내무반 커튼을 다 걷고 환복까지 끝내야 했던 이등병 시절을 생각하며 오늘도 무거운 몸을 일으켜 출근을 한다.

야간복무신조, 10대 군가를 틀리면 머리를 박았고 후배가 실수하면 대신 맞았고 축구에서 지면 연변장을 뛰어야 했다. 목소리가 작으면 얼차려를 받았다.

거기에 비하면 상사의 지시는 너무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업무를 도와주는 동료들도 있다. 최소한 일이 잘못돼도 기합을 받지는 않는다.

가장 늦게 배식을 받고 가장 먼저 다 먹어야 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먹고 싶은 걸 천천히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생겼다.

새벽에 일어나 불침번까지 서야 해서 자면서도 긴장을 놓지 못했지만 이제는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다.


있는 힘껏 '충성'을 외치며 늘 긴장감 속에 세포 하나하나 살아 숨 쉬던 그때를 잊지 말자.

해병대는 아니지만 안되면 될 때까지라는 그 정신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파이팅.


#글루틴 #팀라이트 #매일글쓰기  #편지


매거진의 이전글 일희일비하면서 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