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이 넘게 살도록 내가 만들어 본 음식이라곤 계란프라이, 라면, 김치볶음밥... 더 이상 생각이 안 난다. 결혼을하고 3년 만에 장모님, 장인어른과 같이 살게 되었고 가족들 식사 준비는 장모님의 몫이 되었다. 그리고 12년이 지났다.
이젠 경상도 스타일보다 전라도 스타일의 밥상이 익숙하다.
연애할 때와 신혼 초기 처갓집에 가면 갈비찜과 잡채 등 전라도식 맛깔난 진수성찬에 마음을 빼앗겼다.
결혼하면 이 맛있는 걸 가끔 먹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설레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늘 식사시간에 맞춰 밥을 하고 국이나 찌개를 끓이셨다.
압력밥솥이 돌아가는 소리, 찌개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나면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매일 새로운 메뉴로 식사를 준비한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다. 물론 아버지가 밥상에 좀 진심이긴 했다. 한번 올라왔던 음식, 갓한 밥이 아니면 안 드셨다.
그래서 매번 아버지의 밥상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밥에 잘 구워진 생선 한 마리, 매번 새로운 국이나 찌개가 있었다. 반찬이 많진 않았지만 늘 새롭고 신선하고 따뜻하다는 게 상차림의 포인트다.
어릴 때 어머니가 추어탕을 끓이다 냄비에서 탈출하는 미꾸라지에 기겁을 한 일이 있다. 그래도 끝까지 뜨거운 뚜껑을 손에서 놓치지 않아서 칭찬을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느 날 처음 맡아본 냄새에 냄비를 열어보고 그 고기의 형상에 충격을 받았었다. 보신탕이었다.
정말 모든 요리가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서 시작되었다.
어떻게 요리 방법을 다 아시는지 신기했다.
어른이 되고 주부가 되면 자연히 모든 요리를 할 수 있게 되는 줄 알았다.
장모님은 그런 스타일이 아니다.
물론 그전엔 안 그러셨을지 모르지만 6명의 식구들이 따로따로 하루 3끼를 먹다 보니 밥은 항상 밥통에 있어야 했고 국도 가장 큰 솥에 가득 끓여놔야 했다. 반찬은 락앤락에 가득 담아놓고 계속 꺼내서 먹고 그대로 다시 넣었다. 처음엔 달라진 밥상에 적응이 잘 안 되었지만 아이들 케어부터 모든 집안일을 떠맡으신 장모님께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몇 해전 장모님이 발목에 깁스를 하면서 10년 만에 집안일의 주인공이 나와 아내가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먹은 거 같은 김치찌개 대신 된장찌개, 오징어뭇국, 배추된장국, 두부계란국 등 한 번도 안 먹어봤다시피 한 음식들로 맘껏 만들어봤다. 다행스럽게도 처음 해본 음식들인데도 먹을만했다.
역시 유튜브의 힘이다. 세상 모든 음식을 재료와 레시피를 보고 누구나 따라 할 수 있으니 요즘 세상에 요리를 못한다는 건 그저 게으르다는 변경으로 밖에는 안 들린다.
가급적 그때그때 먹을 밥만 하고, 냉동실 밥, 남은 야채 등을 모아서 한 번씩 볶음밥을 하고 밑반찬들은 작은 그릇에 이쁘게 담아서 내었다. 기분이 좋았다.
가족들이 맛있게 먹어주고 냉장고에 남은 음식들을 정리해 나가고 먹고 싶은 간식들도 채워 넣었다.
2달이라는 기한이 있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걸 매일 수십 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해야 한다면 정말 요즘 세상에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따뜻한 밥상.
어릴 때부터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서 먹었던 한 끼 한 끼.
너무도 빠르게 지나가는 세상 속에 따뜻한 밥상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이 40이 넘어서야 가족들을 위한 밥상을 직접 차려본다. 정성을 쏟은 만큼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갔다.
평생을 상차림과 함께하신 어머니와 장모님.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우셨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감추셨을까.
그 힘든 중노동으로 만들어진 따뜻한 밥상이 아버지와 장인어른, 나와 아내, 아이들을 여기까지 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