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 후 20년 동안 6번의 직장을 거치며 쌓인 인연들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함께 하는 업무들을 해온 경력과 정리를 못 하는 내 습성의 결과물이다. 이 중에 지금 연락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은 10%나 될까? 그럼 나머지 90%는 내가 계속 간직해야 할 인연일까 그저 스쳐 지나간, 이제는 휴대폰에서 삭제해야 할 인연일까? 반대로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을까 그리고 몇 명의 사람들에게서 삭제되었을까?
가끔 카톡 친구 목록을 보다 희미한 기억 속 이름이 눈에 띄어 프로필을 눌러 볼 때가 있다. 사진 한 장, 한 줄의 상태 메시지만으로도 그 사람의 근황이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이 친구 드디어 결혼하네, 이 친구는 요즘 고민이 있구나, 이 친구는 해외여행을 다녀왔네 등. 번호가 저장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안부가 확인되는 셈이다. 심지어 오늘 생일인 친구들은 따로 모아서 알려주니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어도 생일을 핑계 삼아 안부 문자를 슬쩍 던져 볼 수도 있다. 얼굴을 보지 않고 인사를 하다 보니 오히려 더 반갑게 반응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인연을 맺고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것 같다.
인간관계에 열정이 넘치던 20~30대 때 난 내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연락하고 그들을 관리하는 데 힘썼다. 모임에 한 번이라도 빠지면 불안했고, 모임 안에서 내 존재를 확인하려 했다. 그 속에서 내가 얼마나 존재감 있고 인정받느냐에 따라 내 자존감이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했다. 내가 먼저 연락하기보다는 사람들이 나를 찾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사람들과의 깊이 있는 사귐보다는 다수의 평판과 인기가 나에겐 더 중요했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인연을 넓히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다. 한 명 한 명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최대한 호감을 쌓으려고 노력했고 그것이 회사 생활의 가장 큰 자산이고 강점이 될 것이라 믿었다. 전체 임직원 중에 친분 있는 사람의 숫자만 따진다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모은 3,660개의 전화번호.
참 질보다 양에 집중해서 살아온 것 같다. 내 속마음을 꺼내 놓지 못했고 표현할 줄도 몰랐다. 손해 보기도 싫었고 피해 주기도 싫었다.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아픔에 공감해주긴 했지만 결국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과 마음의 거리두기를 한 채 두루두루 친분만 유지하면서 뒤가 비치는 습자지처럼 얇은 관계만 이어왔다.
이렇게 열심히 인연을 늘려왔는데 이제는 인연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시간이 아무 목적 없이 유튜브 세상을 헤매는 것만큼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회사에서도 가급적 점심은 혼자 먹고 잡담도 잘 하지 않는다. 퇴근 후에도 회식이나 모임에 참여하기 보다는 운동을 하거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더 이상 삭제될 수도 있는 90%의 인연에 내 소중한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다.
학창 시절에는 수학여행 갈 때 옆자리에 누구와 앉아야 하나 밤새 고민했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는 열심히 연락처를 수집하기 바빴고, 40대 중반이 되어 이제는 혼자가 더 편해졌다. 그동안 인연에 대한 내 생각은 계속 바뀌었지만 날마다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과 더불어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건 변함이 없다. 이제 더 이상 핸드폰 연락처를 늘리고 싶진 않다. 하지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새로운 번호는 또 추가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환경에서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40년 동안 쉼 없이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이제 하나의 연락처가 추가되면 그만큼 피곤하고 스트레스받는 일이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래서 사람들과 거리두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스스로 외롭지 않고 더 단단해진다고 느껴지는 건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을 함께할 변치 않는 인연인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인연은 3,660개의 인연을 다 합쳐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소중하고 영원히 삭제되지 않는 유일한 인연이다.
한 사람이 온다는 건 우주가 온다는 것이라고 했다. 3,660개의 우주를 만나는 동안 무수히 상처받으며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지만, 무사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가족이라는 특별한 세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자녀들이 수많은 우주를 만나는 동안 외롭거나 아프지 않도록 우리의 세계를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가족이라는 것만으로도 위로와 힘을 듬뿍 얻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