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받침을 펀치로 뚫어 공을 만들어 볼펜으로 톡톡 튕기며 골을 넣는 축구 게임이 유행이었다. 친구들과 축구 게임을 재미있게 한 나는 아빠와도 하고 싶어서(그때는 과묵하신 아빠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늦게까지 아빠가 퇴근하시기를 기다렸다. 숫기 없는 나 대신 엄마가 아빠에게 내가 기다렸다고 얘기해 주셨지만, 아빠는 피곤하셨는지 시시하셨는지 그냥 방으로 가버리셨다.
아빠가 되어보니 눈 빠지게 기다린 아들의 마음을 어찌 그렇게 외면하실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아버지에게 안겨본 기억이 별로 없다. 아버지의 미소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아버지가 즐거워하시는 모습은 사진으로만 봤다. 회사 사람들이나 친구분들과 어울려서 정말 환하게 웃으시며 즐거워하시던 모습을.
경상도의 한 가난한 시골집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갖은 고생 다 하신 아버지가 무뚝뚝하고 자기감정 표현 못하시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소홀하셨던 건 절대 아니다. 가족들을 데리고 자주 여행을 다니셨다. 매년 여름이면 동해 바다로 떠났고 겨울엔 스키장에도 갔다. 그때는 청바지를 입고 스키를 탈 정도로 스키가 대중화되기 전이었으니, 바쁘신 중에도 좋은 곳을 찾아 참 열심히 데리고 다니셨던 것 같다.
아버지에게 칭찬을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크게 혼난 적도 없는 것 같다.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성적에 맞춰 대학에 갈 때도 실망하신 마음은 느껴졌지만 크게 나무라지는 않으셨다. 그 어려운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니시며 수학 과외 교사를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하셨다는 아버지가 속으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그러던 아버지가 나에게 크게 화를 내신 일이 있다. 결혼한 지 5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한다며 큰돈을 손해 보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실패를 부정하고 싶어 현실을 피하려고 했다. 아내가 돈을 벌고 있으니 좀 더 버티고 싶었다.
그때 갑자기 찾아오신 아버지가 가족도 책임지지 못하는 못난 놈이라고 화를 내셨다. 늘 반듯하게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오신 아버지가 진정으로 나를 경멸하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언제든 내 중심으로만 살아왔던 내가 부끄러웠다.
나는 아버지에게 어떤 아들이었을까. 공부를 잘하거나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부모님 속 썩일 만큼 큰 말썽도 피우지 않았던 평범한 아들이었던 것 같다. 크게 자랑할 만한 일도, 기쁘게 해 드린 일도 잘 기억 나질 않는다.
그런 아쉬움을 손녀, 손자를 통해서라도 조금이나마 만회할 수 있어 참 다행이었다. 결혼해서 손녀를 안겨드렸을 때 비로소 아버지의 환한 미소를 실제로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을 바라보실 땐 아버지의 눈이 만화처럼 하트로 변한다. 아이들을 그토록 좋아하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가 아기였을 때에도 아버지는 나를 보며 그렇게 환하게 웃으셨을까?
아이들이 보고 싶으셔서 집 근처로 이사를 오시고, 주말마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귀촌을 선언하셨다. 한적한 시골에 집을 짓고 밭농사도 지으면서 자연에서 사시는 게 아버지의 꿈이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들뜨신 기분이 느껴졌다. 황토 아카데미를 다니시며 귀촌할 땅을 찾으시던 아버지는 연고도 없는 강원도 영월에 터를 잡으셨다. 서울 근교는 땅값이 비싸 엄두를 못 내시고, 먼 곳이지만 산에 둘러싸인 한적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라 선택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현장에 텐트를 치고 숙박을 해결하시며, 인부들과 함께 집을 지으셨다. 장마철에 축대가 무너져 공사비가 두 배로 들고, 인부들과 마찰을 빚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순전히 아버지의 땀과 노력으로 집은 완성되었다. 마을 끝 언덕 위에 있는 조용하면서도 아담한, 운치 있는 집이었다. 한평생 쉼 없이 수고하신 아버지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시며 행복하시길 마음으로 빌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초여름 어느 날, 어머니의 전화가 울렸다. 평소와 다른 차분한 목소리에 긴장감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소화가 안 되고 가슴이 답답해 병원에 갔는데 간암 말기 진단을 받으셨다고 하셨다. 믿을 수가 없었다. 70대 후반이셨지만 정말 청년같이 힘이 넘치셨는데... B형 간염 보균자이지만 건강에 자신 있으셨던 아버지는 정기 검진을 오랫동안 받지 않으셨었고, 그 사이 간암이 급격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3개월 만에 바람같이 세상을 떠나셨다. 평소 깔끔한 성격에 누구한테도 신세 지기 싫어하셨던 아버지답게 옆에서 간병하시던 어머니가 깜박 잠이 드신 새벽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가족들이 힘들어할 시간도, 못난 아들이 효도할 시간도 주시지 않고, 무엇이 그리 급하셨던 걸까. 원하시던 곳에서 이제 막 행복해지고 계셨는데...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시골집에 온 날, 구들목에 불도 제대로 못 피우는 내가 한심스러워 눈물이 쏟아졌다. 귀촌을 준비하시며 설계도와 현장 사진도 보여주시며 아들과 함께 기대와 설렘을 나누고 싶어 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의 꿈에 대해 작은 관심도, 아무런 도움도 드리지 못했다. 아니 귀찮아서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버지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이제는 물어볼 길이 없다. 그럼에도 왜 내게 좀 더 살갑게 대해 주시지 않으셨는지 여전히 묻고 싶다. 나는 어렸으니까, 아들이니까, 내가 먼저 다가가기는 어렵지 않았겠느냐고. 아버지가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오셨어야 하지 않냐고 따지듯이 묻고 싶다.
하지만 아버지가 지금의 나에게 원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것 같다.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가족들을 잘 돌보고, 가족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행복하게 살라고. 그리고 너는 아빠처럼 마음으로만 사랑하지 말고, 아들을 말로도 몸으로도 열심히 표현하며 사랑해주라고...
다음 주면 바람처럼 떠나신 아버지가 별이 되신 지 1,000일이 된다. 이제는 아무것도 대답해 주지 않으셔도 된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셔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