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타이거 Sep 18. 2022

단지 신발을 신었을 뿐인데

추석 연휴가 끝나고 첫 출근을 위해 신발을 신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뒤꿈치에 손가락을 넣고 힘을 주는 순간이었다. 아뿔싸! 갑자기 허리가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 허리디스크가 살짝 있어 무리하면 허리를 삐끗하는 일이 몇 번 있긴 했지만, 고작 신발을 신다가 허리를 다쳤다는 게 어이가 없고 서글펐다. 내 나이가 벌써 이럴 나이란 말인가.

연휴 후 첫 출근부터 휴가를 쓸 수는 없었다. 한 손으로 허리를 받치고 엉금엉금 걸어서 지하철을 탔다. 허리는 35도 정도 접힌 채 펴지지 않는 상태였고 엉덩이 쪽으로 힘이 전해지면 찌릿찌릿 통증이 온몸으로 퍼졌다.

땀을 흘리며 사무실에 도착해서 잠시 일을 보다가 회사 인근에 용하다는 한의원에 갔다. 한의사분이 허리보다 배가 문제라고 하더니 소화는 잘되냐며 규칙적으로 세끼 잘 챙겨 먹으라는 의외의 진단을 내리셨다. 그리고 발과 손에만 따끔하게 침을 놓아주셨다. 사무실에 돌아왔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다.

오후 휴가를 쓰고 집에 오다가 집 근처에 다른 한의원에 들어갔다. 올림픽 스포츠 스타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모니터에 계속 흘러갔다. 허리가 접혀있는 채로 다니면 디스크가 터질 수도 있다고 겁을 주시며 예상대로 추나치료를 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사정없이 다리를 접고 허리를 비트는데 너무 아팠다. 침을 맞고 집에 오는데 여전히 허리는 펴지지 않았다.

다리를 펴고 똑바로 누울 수가 없었다.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보내고 다음날 오전 휴가를 쓰고 아내가 추천해준 정형외과에 갔다. '통증 없는 일상 속으로'라는 슬로건이 눈에 띄었다. 엑스레이를 찍고 초음파로 신경을 체크하고 주사를 맞았다. 역시 주사였다. 통증에는 바로 효과가 있었다.

임상실험이라도 하듯 한의원과 정형외과를 번갈아 가며 열심히 치료를 받았다. 5일째가 되니 허리는 거의 펴진 거 같았다. 아직 일상생활에 불편함은 있지만 이제 좀 살만하다. 디스크에 문제가 없으면 2주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될 것 같다.




부서를 옮긴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업무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추석 연휴를 보냈었다. 느슨해진 운동 주기도 연휴가 끝나면 다시 열심히 달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책도 읽고 글도 쓰고 한동안 내려놨던 일들도 다시 꾸준히 해볼 참이었다.

그런데 단지 신발을 신다가 나의 모든 계획과 목표들은 물거품이 되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지만 이건 너무 허무하다. 삽질을 하거나 무거운 걸 들다가 허리에 무리가 갔다면 이렇게 당황하진 않았을 거다.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약한 존재인가. 한 시간, 아니 5분 앞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 채 혼자 열심히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니 조물주가 보시기에 얼마나 가소로웠겠나 싶다. 그렇다고 계획 없이 인생을 살 수는 없지만 이런 일에 정신적인 타격을 덜 받으려면 마음을 좀 더 가볍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하느라 정신없이 바빠서 친구들 만날 시간은 없고, 부모님께 안부 전화 한번 하기는 더 힘들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들은 늘 뒷전으로 살아가지만 결국 이렇게 예상 못한 사고 앞에서 우리는 멈출 수밖에 없다. 아무리 치열하게 달려왔더라도 방법이 없다. 잠시 모든 걸 내려놔야 한다. 그제야 그동안 왜 이렇게 정신없이 살았는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달리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소중한 걸 많이 놓치고 있었던 나를 반성하며 앞으로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굳게 다짐도 해본다.  

하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전과 똑같이 앞만 보며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한다.


허리를 다치니까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서있으면 허리가 아프고 앉아있으면 불편하고 누워있기도 힘들다. 허리를 못 굽히니 세수도 못하겠고 머리도 못 감겠다. 배가 접혀있으니 소화도 잘 안된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니 몸살도 오는 것 같다.

한 집안의 가장이자 국가의 경제를 책임지던 산업일꾼이 한순간에 혼자서는 일상생활도 어려운 병약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끔찍한 일이다. '아빠의 안전은 우리 가족의 희망이래요'라는 공사장 현수막이 떠오른다. 그래 내 몸이 나만의 것이 아니지. 원인 모를 질병이야 어쩔 수 있겠냐만 나의 실수나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사고의 경우 변명의 여지가 없다. 가장으로서의 직무유기인 것이다. 평소 허리가 안 좋았다면 앉아서 신발을 신거나 주걱을 사용했어야 했다. 2주간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업무에도 지장이 있고 운동도 못하고 아프니 짜증도 자꾸 난다. 소중한 내 인생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회사 일도 너무 바쁘고 머리가 복잡해서 코로나에 걸려 2주간 격리나 되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멈출 용기는 없으니 멈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으면 싶었던 거다. 그렇게 잠시 현실과 분리되고 나면 확실히 기분 전환도 되고 새로운 에너지도 생기는 것 같다.

사실 이번에도 비슷한 마음이 있었다. 긴 휴가나 연휴가 지나고 출근할 때가 되면 늘 조금 더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수록 그 쉼의 주기가 더 짧아지는 것 같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는 게 점점 힘겨워져서일까. 내 속도는 느려지는데 세상은 점점 더 빨라지니 따라갈 방법이 없다. 이제 세상의 속도에 뒤처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된 거 같다. 디지털 노마드 세상에서 젊은 세대와 똑같이 경쟁해서는 승산이 없다. 느려지는 나의 신체능력과 두뇌회전을 인정하고 나만의 속도로 가야겠다. 세상의 변화보다는 나의 페이스에 맞추어 살아가자.

서두르면 일을 그르치게 되고, 급하면 사고가 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연스레 늙어가고 서서히 퇴행하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다시 한번 깨닫는다.

세상의 변화에 조금 뒤처질지는 몰라도 나의 건강, 나의 일, 나의 가족이 제일 중요하니까.

단지 신발을 신었을 뿐인데, 이렇게 소중한 교훈을 얻다니...


매거진의 이전글 말이 필요 없는 특별한 친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