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타이거 Jan 06. 2023

말이 필요 없는 특별한 친구

초등학교 4학년 학예회 때 친구와 사투리 뉴스라는 콩트로 대상을 받은 적이 있다.

다소 내성적인 편이었던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ENFP의 외향적인 성향이 많이 드러났던 것 같다. 가족들이 다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새벽에 친구를 만나 동네를 탐험하기도 했고, 비 오는 날 비를 흠뻑 맞으며 뛰어놀기도 하고, 매일 공놀이에 친구집에도 자주 놀러 갔다.


대부분 초등학교 학년부터 대학생 때까지는 가족보다 친구가 우선이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경험의 대부분은 친구와 하게 되는 것 같다.

5학년땐 친구 생일잔치에 처음 갔고, 6학년땐 조조영화를 보고 유행처럼 우표를 모았다. 중2 때 도박을 처음 배웠고(짤짤이, 책 치기), 노래방, 비디오방, 볼링장, 보드게임방 모두 다 친구들과 처음 갔다. 대학교에선 술도 처음 마셨고 MT도 가고 단체미팅도 했다. 나이트와 클럽도.  

혼자 할 땐 별거 아닌 것들도 친구들과 함께 할 때 신나고 즐거운 일이 되었다.


그러다 회사원이 되자 직장동료가 친구들의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함께 커피 마시고 일하고 밥 먹고 회식하고, 심지어 워크숍과 야유회도 정기적으로 간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 키우다 보면 따로 친구들을 만나는 건 사치다. 다들 비슷한 처지다.  

그래서 회사 선후배들로 관계와 유흥의 욕구를 채우게 된다.


이제 40대 중반이 되자 퇴근 후에 직장동료들과 어울리는 횟수가 줄었다.    

열정도 줄고 체력도 줄고 주량도 줄다 보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의미를 찾기 힘든 자리에서 애써 내 감정과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뭐라도 될 것 같이 열심히 뛰어왔지만 그저 평범한 월급쟁이일 뿐, 더 이상 직장에서 크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가급적 스트레스 덜 받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동료들과 소소한 마음을 나누며 평안히 지내고 싶을 뿐이다(근데 사실 이게 제일 어려운 일이다)

 

중년이 되어 친구에서 가족으로 에너지가 전환되는 시점에

아이러니하게도 자녀들에게는 이제 가족보다 친구가 우선인 나이가 되어 버렸다.


살아오면서 늘 부족했던 시간과 에너지가 처음으로 남게 되었는데, 오히려 친구도 가족도 조금 멀어진 느낌이랄까.

그 자리에 6년 전 우리 가족과 운명적으로 만난 반려견 '승리'가 들어왔다.


옛날엔 반려견 키우는 집이 매우 드물었다. 서울 아파트에 살던 우리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는 건 쉽지 않았다. 어머니가 지인을 통해 시골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 오셨지만 대소변을 못 가리는 강아지를 어린 마음에 받아들일 수 없었고 다시 시골로 돌려보냈었다.

  

그렇게 강아지와 못다 한 추억이 가슴 한편에 남아있던지라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승리를 데려왔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승리를 맞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걸 그날 알게 되었다.    

우리는 작고 귀여운 강아지를 데려왔지만 승리는 말티즈 중에서도 아주 큰 편이었다. 금방 중형견만큼 자라 버렸다. 당연히 매우 건강한 놈일 거란 사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알레르기 때문에 사료 외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 아예 없었고 췌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피부도 약해 피부병도 안고 산다.  


우리도 당황했지만 승리도 적잖이 당황했을 거 같다.

아이들은 이뻐만 할 뿐 아직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목욕시키고, 응가를 치워주기에는 어렸고, 나와 아내는 바빴다. 강아지 케어는 장모님 몫이었다. 어릴 때 산책을 많이 안 시켜서인지 데리고 나가면 너무 많이 짖었다. 그래서 처음에 산책은 내가 전담할 수밖에 없었다(가족들은 다 마음이 약해서 승리를 절대 혼내지 못한다)

집에 오면 쉬고 싶은데 승리가 달려드니 정신이 없고 귀찮고 혼란스러웠다.  


정기적으로 예방접종 해야 하고 털 깎아줘야 하고 산책시켜야 하고 밥 줘야 하고 패드 갈아줘야 하고 씻어줘야 한다. 이유는 모르지만 화가 나서 일부러 이불 위에 쉬라도 하는 날이면 한바탕 난리가 난다.   

도대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 가지도 없고 사고만 치는 이 녀석을 왜 아무 생각 없이 데려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니 화가 났다.


가끔 너무 화나서 승리를 혼내고 엉덩이를 때려주는 나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기도 한다.

대체 말 못 하는 이 아이는 무슨 죄란 말인가. 하루종일 나만 기다렸을 텐데.


너무 지치고 힘들었던 어느 날.

퇴근하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는데 어느샌가 승리가 옆에 와서 몸 전체를 밀착하고 누웠다. 그리곤 나를 쳐다봤다. 순간 흠칫했다. 분명 승리가 날 위로하고 있었다.  

눈빛으로, 몸으로 나에게 수고했다고 얘기하는 거 같았다.

그동안 미안했던 일들이 떠올라 코끝이 찡했다.

서로 많은 얘기를 나누지 않아도 그저 같이 있는 것 만으로 편안하고 위로가 되는 친구 같은 승리.


승리의 시간은 이제 우리가 함께한 시간만큼도 남지 않았다.

늘 언제나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나를 바라봐 주었듯이

이제 남은 시간 나도 승리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

말이 필요 없는 진짜 친구로..



#글루팀  #팀라이트  #매일글쓰기  #친구

매거진의 이전글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