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침에 일어나기가 더 힘들었다. 날씨가 흐려서일까.
평소보다 15분이나 늦게 일어나 후다닥 준비를 했다. 날씨가 좀 풀린 듯 하지만 캄캄한 출근길은 너무 춥다. 오늘은 회식도 있어 잠시 망설이다 롱패딩을 입고 집을 나섰다.
오늘 아침은 유독 피곤하다. 목과 어깨도 많이 뭉친 느낌이다. 목요일쯤 되면 피로도가 최고조에 이른다.
다행히 내일은 재택근무라 작은 희망을 안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아침마다 지하철에서 성경말씀을 듣는다. 월화수 열심히 들었더니 이제 좀 꾀를 부리고 싶어 진다. 오늘의 목표량이 있지만 한 장만 듣고 유튜브를 열었다. 알고리즘이 나를 반기며 즐겨보는 예능 영상들을 보여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종착역에 도착했다. 매서운 한강 바람을 뚫고 사무실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많아 6층까지 걸어왔더니 인중이 촉촉하다.
자리에 앉아 선풍기부터 튼다. 노트북을 켜고 후배와 커피를 뜨러 휴게실에 갔다. 작년 8월에 부서 이동을 했는데 팀 인원이 총 4명이다. 여의도에는 팀장 제외하고 나와 후배뿐이다. 후배와 나는 15살 차이다.
입사 7년 차인 후배는 이미 직장생활의 풍파를 많이 맞아 주도성과 열정을 잃어버린 채 그저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해나가고 있다. 나도 요즘 많이 다운되어 있는 상태라 편하고 잘 맞는다. 둘 다 최근에 ENFP에서 INFP로 바뀐 케이스이기도 해 여러모로 잘 통한다.
커피는 디카페인 에스프레소에 얼음 듬뿍 넣고 남은 절반은 찬물을 채운다. 한겨울에도 따뜻한 사무실에서 선풍기 틀고 아이스커피를 먹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로는 들지만 마음에 감흥은 없다.
예전에는 PC를 켜면 홍보팀에서 정리해 놓은 기사 스크랩을 읽고 동료들과 잡담하며 웃음으로 하루를 시작했지만 지금은 PC를 켜고 어제 하던 문서 작업을 그대로 이어서 한다. 클라우드 환경이라 PC를 켜면 어제 작업하던 엑셀과 PPT가 그대로 보인다. 다음 주에 있을 회의를 위해 올해 사업계획을 최종 수정 중이다. 매년 추석즈음에 시작되는 사업계획은 해를 넘겨 1월이 되어서야 겨우 마무리되곤 한다.
노트북에 연결된 큰 모니터를 보면서 작업하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목이 점점 화면 속으로 들어가고 엉덩이가 의자에서 멀어지곤 한다. 자세를 고쳐 잡지만 어느새 다리를 꼬고 있다. 그래도 균형을 잡기 위해 양발을 고르게 꼰다.
팀장이 티타임을 하자고 한다. 이사 전이라 자녀 방과 후 신청이 안되었는데 다행히 부동산에서 전입신고는 먼저 해도 된다고 알려줘서 신청을 할 수 있었다는 얘기. 상무님 아들이 이번에 K대 한의예과와 서울대에 동시에 합격했다는 얘기. 그러다 자연스럽게 업무 얘기로 넘어온다. 이럴 때 평소 보고할 것들을 미리 슬쩍 던져보면 보고서 작업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다.
언제까지 회사에서 시키는 일, 해야 하는 일, 누군가의 기호에 맞추는 일만 하면 살아야 할까란 생각도 살짝 들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오전은 3시간만 일하면 점심시간이라 정말 순식간에 지나간다. 후배가 오늘의 메뉴 5가지를 불러준다. 후배가 어떤 걸 좋아할지 맞추는 시간이다. 예상되는 2가지를 얘기했더니 그중에 하나를 덥석 문다.
분식이다. 역시 젊은 친구들은 분식을 좋아한다. 오랜만에 먹는 라면이라 나도 나쁘지 않았다. 김밥과 비빔만두까지 담았더니 너무 많아서 조금 남겼다. 후배가 편의점을 가자고 했다. 별다방 라테커피를 골랐다. 역시 식사 후엔 달달한 커피다. 후배가 계산을 했다. 밥 먹었더니 피로와 함께 졸음이 몰려왔다. 의자를 조금 눕혀 자세를 취해보다가 왠지 불편해서 책상에 엎드렸다. 10분 정도 지났는데 잔 건지 눈만 감고 있었는지 구분이 잘 안 되는 몽롱한 상태로 다시 노트북 화면을 켰다.
그렇게 오랜 세월 보고서를 만들었는데 왜 실력이 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20년 정도 했으면 생활의 달인에 나올 정도로 보고서를 만들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직도 보고가 생기면 문서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니 점점 더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20년 동안 다른 걸 이만큼 했다면 전문가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후배와 팀장외에는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눈 사람이 없다. 대인기피증이 생긴 건 아닌데 요즘엔 그냥 내 일만으로도 버겁다. 그저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하지만 오늘은 기획팀과 3:3 회식이 있다. 예전엔 회식 있는 날은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회식 생각에 설레고 기분이 좋았다. 건배사는 무얼 할지 분위기를 어떻게 띄울지 온종일 즐거운 고민을 했다.
사람들도 늘 나에게 기대하는 부분이 있었다. 십중팔구는 예상한 대로 내 역할을 해냈고 회식은 화기애애했다.
보쌈과 전골, 만두가 맛있는 곳이었다. 대화는 늘 비슷하다. 서로 친분이 많지 않을 경우 호구조사부터 시작해서 기혼자들은 자녀얘기, 미혼자들은 애인이 있는지, 없으면 소개해주자는 얘기. 집이 어느 동네인지. 집값은 얼마나 떨어졌는지. 그러다가 현재 조직 분위기나 업무 이야기, 마지막은 언제나 라떼 이야기다.
예전엔 아침에 업무시작하기 전 팀별로 모여 혁신 구호를 외쳤다는 이야기, 혁신 구호가 '일단 해보고 생각하자'여서 생각하고 해야지 왜 해보고 생각하라고 하는 걸까 이해가 안 되었다는 얘기. 그 후로는 다 같이 체조를 하고 동료들 어깨 주무르기를 하다가 여사원들이 싫어해서 체조시간이 없어졌다는 얘기.
회식하면 꼭 노래방에 갔고 팀장님들이 여사원들이랑 부르스를 췄다는 얘기(지금의 팀장님이 그때 그 여사원이었다). 그땐 그게 당연한 문화라는 사회적인 가스라이팅에 팀장님들도 당해서 팀워크를 위해 어쩔 수 없이하신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 회사가 어려워져서 조직을 통폐합해서 하루아침에 리더들이 절반이 사라졌다는 얘기. 사원증뒤에 부서 주소록이 있어서 신입사원이 들어올 때마다 그걸 새로 만들어야 했다는 얘기.
나도 그 시절을 겪었다. 추억이 새록새록하지만 이런 대화 패턴은 이제 지겹다.
모두가 열심히 대화 소재를 찾고 대부분 아는 얘기를 누군가 앞장서서 하고, 새로운 것도 없는데 공감하고 리액션해줘야 한다. 어떤 질문도 어떤 답변도 큰 의미를 못 찾겠다.
요즘 코칭을 배우고 있는데 8시부터 온라인 모임이 있다. 다행히 8시가 조금 넘어 자리가 마무리되었다.
지하철에 오면서 줌을 접속했다. 복면코칭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누군가의 고민을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코치라는 직업이 매력적이다. 하지만 아직 확신은 없다. 좀 더 배우고 연습해 봐야겠다.
9시에는 교회 모임이 있었다. 주일에 있을 구역모임 내용을 미리 목사님이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10시가 되어 드디어 글을 쓴다. 글루틴 4일 차.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 최소한 첫 번째 포기자가 될 순 없다. '일기'라는 주제를 보고 출근길에 고민하다가 그냥 초등학교 때처럼 일기를 한번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초등학생처럼 사실과 느낀 점을 최대한 단순하게 적어보겠다는 콘셉트만 정해놓은 채 밤 10시가 되었다. 일기를 쓰는데 아들과 딸이 자꾸 방에 들어온다. 이제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퇴고해야겠다.
일기를 읽어보니 내 바쁜 하루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수고했어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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