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타이거 Jan 19. 2023

여행 100배 즐기기

여행... 말만 들어도 설레고 가슴이 뛰는 단어다.

P형인 나는 여행 중에 일어나는 돌발상황과 사건을 즐긴다. 사실 계획을 안 세웠으니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계획 세우는 게 귀찮기 때문에 말하는 나름의 명분이기도 하고.

모든 여행에 날짜, 시간, 분 단위까지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일정을 진행해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런 변수가 없는 여행, 이미 모든 게 예측되는 여행이 어떻게 재미있을까란 의문이 든다.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성향으로는.


한창 유럽여행이 붐이었던 그 시절. 남들 하는 건 꼭 해봐야 하는 나도 역시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 당시 가장 유명한 여행책은 '유럽 100배 즐기기'와 '자신만만 유럽여행' 2가지 시리즈였다.

모든 일정과 먹거리 놀거리 숙소 정보까지 책 한 권만 있으면 유럽 1 달여행은 식은 죽 먹기 같았다.

100배 즐기기 시리즈를 택한 나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은 채 런던 땅을 밟았다.

믿는 거라곤 책 한 권과 젊음뿐이었던 그때의 호기가 가끔 그립다.  


런던 in 런던 out으로 항공권을 샀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얼마나 준비 없이 떠났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준비가 부족해서 더 많은 걸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돌발상황과 사건은 충분히 있었다는 사실에 그저 만족한다.




그중에서도 스페인 해변에서 만난 게이 아저씨는 잊을 수 없다.

런던에서부터 100배 책의 가이드로 착실히 일정을 소화하며 스페인까지 도착한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박진감 없는 투우와 환상적인 분수쇼를 보고 이튿날은 좀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가까운 해변으로 갔다.

혼자 수영복을 입고 물에서 놀고 있는데 한 털보 아저씨가 자꾸 나한테 말을 건다.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는 듯 스페인어로만 떠들어서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이름이 파울로인 건 분명했다.

쉴 새 없이 말하는데 자기 팔과 내 팔을 비교하면서 계속 미소 짓는다. 

내 속살이 그렇게 하얗다는 걸 나도 처음 알 정도로 구릿빛 피부의 털보 아저씨 옆에 있으니 난 백옥처럼 하얗고 매끈했다.

그러더니 손짓을 하며 어딜 같이 가자는 것 같았다.

순간 느낌이 왔다. 그저 외국인에게 호의적이고 친절한 동네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역시 다른 목적이 있었다.


호기심에 따라간 곳엔 또 한 명의 중년 아저씨가 돗자리를 깔고 누워있었다.

파울로 아저씨가 나를 그의 옆으로 안내해 돗자리에 앉았더니 누우란다.

머 여기까지 왔으니... 누웠다.

파울로도 옆에 따라 눕는다.

졸지에 이름 모를 아저씨와 파울로 사이에 껴서 살이 닿을 정도였다.

다음 스텝이 너무 예상됐지만 아직은 물증이 없었다.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길 불과 몇 초.

두 명의 건장한 게이 xx들의 묵직한 손이 내 몸을 부드럽게 쓸기 시작했다. 연륜이 묻어나는 매우 능숙한 솜씨였다.

이번 돌발상황의 에피소드는 여기까지면 충분했다.


난 '노노노노노'를 연발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혹시나 힘으로 나를 제압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뒤도 안 돌아보고 인파 속으로 걸어갔다.

찝찝한 마음에 짐을 챙겨 복귀하는데 어느새 옆에 쫓아와서 또 머라 머라 떠든다.

무시하고 걸어가는데 해변 끝까지 쫓아오는 게 아닌가.

설마 나를 자기들과 같은 쪽이라 생각하는 건가.

하긴 자진해서 돗자리에 눕기까지 했으니 오해할만하다. 내가 진행 방식이 맘에 안 들었다고 생각해서 계속 다른 방식을 제안하는 거 같았다.

난 걸음을 멈추고 파울로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얘기했다.

'나 남자 싫어. 씨 x 꺼 x. 가라고 가!!'

그제야 이해를 했는지 파울로는 아쉬운 눈빛으로 내 곁을 떠나갔다.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며 웃는다.

기분이 아주 찝찝하다.

잊고 싶지만 절대 잊히지 않는 파울로 아저씨.

해변에서 헌팅은 잘하고 계신지.


여행의 돌발상황이 여행을 100배 즐겁게 해 준다고 난 아직 믿는다..



#글루틴 #팀라이트 #매일글쓰기 #여행





매거진의 이전글 주유를 하고 연료 캡을 닫지 않으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