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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100배 즐기기

by 디타이거

여행... 말만 들어도 설레고 가슴이 뛰는 단어다.

P형인 나는 여행 중에 일어나는 돌발상황과 사건을 즐긴다. 사실 계획을 안 세웠으니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계획 세우는 게 귀찮기 때문에 말하는 나름의 명분이기도 하고.

모든 여행에 날짜, 시간, 분 단위까지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일정을 진행해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런 변수가 없는 여행, 이미 모든 게 예측되는 여행이 어떻게 재미있을까란 의문이 든다.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성향으로는.


한창 유럽여행이 붐이었던 그 시절. 남들 하는 건 꼭 해봐야 하는 나도 역시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 당시 가장 유명한 여행책은 '유럽 100배 즐기기'와 '자신만만 유럽여행' 2가지 시리즈였다.

모든 일정과 먹거리 놀거리 숙소 정보까지 책 한 권만 있으면 유럽 1 달여행은 식은 죽 먹기 같았다.

100배 즐기기 시리즈를 택한 나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은 채 런던 땅을 밟았다.

믿는 거라곤 책 한 권과 젊음뿐이었던 그때의 호기가 가끔 그립다.


런던 in 런던 out으로 항공권을 샀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얼마나 준비 없이 떠났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준비가 부족해서 더 많은 걸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돌발상황과 사건은 충분히 있었다는 사실에 그저 만족한다.




그중에서도 스페인 해변에서 만난 게이 아저씨는 잊을 수 없다.

런던에서부터 100배 책의 가이드로 착실히 일정을 소화하며 스페인까지 도착한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박진감 없는 투우와 환상적인 분수쇼를 보고 이튿날은 좀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가까운 해변으로 갔다.

혼자 수영복을 입고 물에서 놀고 있는데 한 털보 아저씨가 자꾸 나한테 말을 건다.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는 듯 스페인어로만 떠들어서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이름이 파울로인 건 분명했다.

쉴 새 없이 말하는데 자기 팔과 내 팔을 비교하면서 계속 미소 짓는다.

내 속살이 그렇게 하얗다는 걸 나도 처음 알 정도로 구릿빛 피부의 털보 아저씨 옆에 있으니 난 백옥처럼 하얗고 매끈했다.

그러더니 손짓을 하며 어딜 같이 가자는 것 같았다.

순간 느낌이 왔다. 그저 외국인에게 호의적이고 친절한 동네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역시 다른 목적이 있었다.


호기심에 따라간 곳엔 또 한 명의 중년 아저씨가 돗자리를 깔고 누워있었다.

파울로 아저씨가 나를 그의 옆으로 안내해 돗자리에 앉았더니 누우란다.

머 여기까지 왔으니... 누웠다.

파울로도 옆에 따라 눕는다.

졸지에 이름 모를 아저씨와 파울로 사이에 껴서 살이 닿을 정도였다.

다음 스텝이 너무 예상됐지만 아직은 물증이 없었다.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길 불과 몇 초.

두 명의 건장한 게이 xx들의 묵직한 손이 내 몸을 부드럽게 쓸기 시작했다. 연륜이 묻어나는 매우 능숙한 솜씨였다.

이번 돌발상황의 에피소드는 여기까지면 충분했다.


난 '노노노노노'를 연발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혹시나 힘으로 나를 제압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뒤도 안 돌아보고 인파 속으로 걸어갔다.

찝찝한 마음에 짐을 챙겨 복귀하는데 어느새 옆에 쫓아와서 또 머라 머라 떠든다.

무시하고 걸어가는데 해변 끝까지 쫓아오는 게 아닌가.

설마 나를 자기들과 같은 쪽이라 생각하는 건가.

하긴 자진해서 돗자리에 눕기까지 했으니 오해할만하다. 내가 진행 방식이 맘에 안 들었다고 생각해서 계속 다른 방식을 제안하는 거 같았다.

난 걸음을 멈추고 파울로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얘기했다.

'나 남자 싫어. 씨 x 꺼 x. 가라고 가!!'

그제야 이해를 했는지 파울로는 아쉬운 눈빛으로 내 곁을 떠나갔다.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며 웃는다.

기분이 아주 찝찝하다.

잊고 싶지만 절대 잊히지 않는 파울로 아저씨.

해변에서 헌팅은 잘하고 계신지.


여행의 돌발상황이 여행을 100배 즐겁게 해 준다고 난 아직 믿는다..



#글루틴 #팀라이트 #매일글쓰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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