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일기

이탈-제주

by 윤과 슬

제주로 입도를 진지하게 생각했을 만큼 나는 제주가 좋다.

제주 바다에서 보았던 윤슬 때문이려나. 윤슬을 보노라면,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낀다. 문득 언젠가 내가 이렇게 벅차도록 볼 것이 또 있을까.

혼자 낸 질문은 이젠 답으로 바뀌었다. 많은 것을 벅차게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제주에서 산다면 이렇게 살지 않을까 상상을 한다.

쉬는 날이면 어디 떠날 생각 없이, 그저 내일에 미리 쫓기지 않고 여유로이 하고 싶은 것들을 한다. 새벽시간이 다가와도 개의치 않는다.

눈이 빠져라 핸드폰을 보거나 밀린 드라마를 보거나. 그리곤 자야지 하고 자는 게 아니라 그냥 잠에 드는 것이다. 늘 일어나는 시간에 깨어도 다시 한번 눈을 감는다.

그리곤 허리가 뻐근해질 때가 되어서야 몸을 일으킨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피고, 손에 대충 잡히는 것들로 짐을 꾸린다. 속옷대신 수영복을 입고 외출준비를 한다.

대충 근처에 있는 바다로 목적지를 잡고, 노래를 듣는다.

바다의 온도는 조금 느리다. 육지의 더위가 한풀 꺾일 때쯤에야 이제 시작이라는 듯 온도를 올리는.

자연만의 여유에 동화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 이질감을 느끼며 바닷속을 유영하는 것.


1.

행복한 상상을 뒤로하고 제주공항을 나선다.

이탈. 하루 종일 바다에 들어가 있을 테야. 당찬 포부를 담은 발걸음으로.

여행 전에 잠시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잘 다녀와. 좋은 사람 있는지 잘 보고.”

“좋은 사람 말고, 좋은 나로 돌아올게. “

짧은 대화였지만, 나에게 집중하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진하게 베여있다.

택시를 타면, 해안선을 따라 달려 눈길은 자연스레 창밖으로 집중된다.

높지 않은 건물인데, 낮은 차 안에서 보니 방해물이 따로 없다.

방해물 사이로 틈틈이 보이는 바다에, 햇빛이 비추는 윤슬더미에 멍하니.

불현듯 잊고있었던 그 생각을 떠올렸다.

'아, 나 괜찮지 않았구나.'

늘 제주에 갈 때면, 무뎠던 나에게 죄책감이 든다.

많은 현상 중에서 초심을 지키게 만드는 것이 있을까?

나는 윤슬이라 적으련다.


2.

의도치 않은 약속이 생겼다. 오랜만에 그리웠던 얼굴을 볼 수 있겠거니.

여섯 시간이 넘는 대화 속에서 때론 어쩔 수 없는 침묵을, 때론 의미심장한 침묵을 지켜본다.

자연스럽고 싶어 지게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임을 강조할 필요 없이, 왜곡될까 겁낼 필요 없이.

누군가의 단점이 아닌 특징을 계속해서 발견했던 시간.

내가 왜곡을 하지 않으니 상대방도 나를 왜곡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주는 편안함은 꽤 컸다.

부러 논제를 던지지도 않았고, 궁금한 것들을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물음에 답하고, 궁금함에 질문했다.

문득, 침묵을 무서워하는 내가 떠올랐다. 아, 이게 대화구나.


3.

친구에게 나와 잘 어울리는 곳이라며 추천받은 카페로 향했다. 타로를 봐준다기에 예약문의를 했건만 답이 오질 않는다.

일단 가보지, 뭐.

호주에서 왔다고는 알았지만 호주사람인줄은 몰랐던 나는 부랴부랴 영어로 주문한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할 때면 왠지 장난꾸러기가 되어버린다. 상황극을 상상하기.

여긴 호주고, 난 자주가는 카페를 들린 거야. 영화속 주인공 처럼.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꽤나 일상이 재밌어진다.

따뜻한 메리골드 티 그리고 바나나브레드. 요즘은 바나나브레드를 굽는 집이 많이 없는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대충 혼자 앉아도 괜찮을 것 같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아까부터 날 만지라는 듯 부러 천천히 움직이는 고양이에게 향한다.

왠지 모르게 드는 괘씸함에 손을 거두고 읽던 책을 꺼냈다.

중간중간, 점원이 이해할 수 없는 질문들을 내게 던진다.

가염버터인지, 무염버터인지. 레몬을 좋아하는지. 단 걸 좋아하는지.

내 주문에 이런 질문들이 필요한지 당최 모르겠지만 대답은 한다. 내가 주문을 잘못했나.

이내 나온 음식들에 그 의심은 눈 녹듯 사라졌다.

한 모금 마신 티에서는 은은한 레몬향의 산뜻함이.

바나나브레드엔 생크림 대신 가염버터 한 조각이.

홍차와 레몬을 곁들인 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마셔본 적은 없었는데.

바나나브레드와 가염버터라니, 호주는 이렇게 바나나브레드와 버터를 자주 먹는다고 한다.

왜 이 조합을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아니야,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게 다행이야.

보려던 타로는 결국 못 봤지만, 이렇게 뜻하지 않은 수확을 할 때면, 전혀 개의치 않아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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