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살이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던 적 있는가.
나는 있다. 딱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선택의 갈래 앞에서 느낀 극심한 외로움과 고통은 결국 인생 자체를 내려놓고 싶게 했다. 누군가는 죽기까지 생각할 정도의 고민이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랬다. 인생이 그렇잖나. 내가 느끼는 공포는 나를 집어삼킬 듯 턱끝까지 차오르나 타인에게 내 모습은 얕은 물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과 비슷해보일 수 있다. 다리에 힘 딱 주고 무릎 한 번만 펴면 바로 설 수 있을텐데…
나는 크리스천이라 기도도 해보았다.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길이 무엇인지 물었다. 응답을 느끼기도 전에 내가 다시 답했다.
'저는 지금 살아있는 게 순종하는 거예요. 할 수 있는 건 그것 밖에 없습니다. 살아있는 것. 숨 쉬려고 하는 것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순종입니다.'
_
나는 엄마의 삶을 그대로 입었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히 내 뜻대로 살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부모님께 좋은 딸로서 살아내기 위해 스스로를 자제하고 통제했다. 그건 부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 행동들이기도 하지만, 인정받기 위함이기도 했다. 내가 반듯하게 살면, 부모님도 늘 나를 좋은 딸로, 자식으로 여겨주실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서른이 넘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연애를 하면서 나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부모님 말씀을 듣고 싶지 않아진 것이다. 부모님은 내가 만나는 사람과의 연애를 싫어하셨고, 나는 그래도 이 연애를 이어가고 싶었다. 내가 만나는 친구는 결혼을 전제로 나와 깊이 교제하기 원했지만, 우리 부모님께서 반대하신다는 사실에, 또 내가 부모님께 순종적인 딸이라는 것 때문에 관계에 불안함을 느꼈다.
엄마, 나, 남자친구.
그 사이에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어느 한 쪽도 양보할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됐고, 나는 소진되고 있었다. 내 양팔을 한쪽은 엄마, 한쪽은 남자친구가 잡고서 각 방향으로 아주 세게 잡아당기고 있는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그리 대단한 사랑을 한 것도 아니다.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닿아서 만났고, 데이트하고, 사랑해주는 그런 평범한 연애였지만, 남자친구의 배경이 나와 많이 달랐던 것이, 30대 중반이 된 우리의 나이가 장벽이었다. 남자친구는 연애를 계속하더라도, 결국 결혼의 문턱을 넘지 못할 거라고 생각되면 힘들더라도 지금 관계를 매듭지어야 한다고 했다. 엄마는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하시면서 관계를 정리하라고 하셨다.
마음이 급해졌다. 양쪽이 나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모든 결정권을 나에게 쥐여줬다. 나만 결단하면 되는데, 어쩌면 답도 다 나와있는 것 같은데, 말로 뱉기가 어려웠다. 처음엔 나도 남자친구의 배경이 신경쓰였다. 하지만 항상 진지모드인 나를 툭 쳐서 웃게 만들어주는, 세상 다 짊어진 것 같은 걱정도 별거 아닌 것처럼 만들어주는 이 친구가 좋았다. 그래서 연애를 하다보면, 우리 관계가 더 견고해지면 다른 것들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마냥 연애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날 때마다 결혼 이야기를 하는 남자친구를 안심시킬 수가 없었다. 나는 대학원 입학을 앞뒀고 새로운 환경에서 안정될 때까지 결혼에 대한 고민은 못할 것 같았다.
'너랑 결혼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냐. 너무 급해.'
많은 시간 울면서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이 말이 그에게 통할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 마음이 다시 한 번 맞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평생을 따라온 사랑, 그리고 새로운 사랑. 그 사이에서 나름대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분투했다. 내가 진짜 사랑한 사람이면 어떡하지? 이 사람을 놓고서 후회하고, 엄마를 원망하면 어쩌지? 이런 혼란한 생각들 속에 내 진짜 마음은 무언지 분간하기가 어려워서 글을 썼다.
마침내 이렇게 적고나니 정말 별 거 아닌 일 같다. 내 진심이 닿는다면 인연이고, 그러면 이어질 것이요, 혹은 돌고 돌아 어떻게든 만날 것이다. 결혼은 집안과 집안이 만나는 것이고, 부모님의 반대가 있다면 결혼을 하고서도 넘어야 할 산들이 정말 많다는 걸 어렴풋이 안다. 그러나 한편, 인생이 참 별 게 없는데 사랑하는 한 사람과 투닥거리더라도 서로 의지하고 정들어 살아가는 것만큼 의미있는 일도 없는 것 같다.
_
엄마와 남자친구 사이에서 딱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는 게 의미없다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 모두 나에게 참 소중한 사람인데, 둘 중 누구에게도 내 속을 털어놓을 수 없어 슬펐고 답답했고 공허했다. 그러자 소중한 이들도, 대학원도, 그 후의 커리어도 그냥 다 내려놓고 싶은 순간이 왔다. 그리고 이제 조금씩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 같다. 적어도 죽을 만큼 고민했으니 어떤 선택을 하건 후회가 덜했으면 한다.
살다보면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들이 온다. 그 어려움의 정도는 나만 아는 것. 홀로 풍파를 견디고 서있는 동안 설령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라도, '숨 쉬는 것 만이라도' 해내고 있는 당신을 보며 그거면 된다고 말해줄 수 있길 바란다. 나를 무섭게 짓누르는 부정적인 생각들과 무기력함에 지지않고 어떻게든 살아내보려 애쓰는 것이니까. 생산적인 활동, 긍정적인 생각들을 당장에 할 수 없을지라도, 나를, 생명을 살리는 중이니 숨만 쉬고 있더라도 반드시 그 시간을 귀하고 값지다 여기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