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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쏭이쌤 Apr 17. 2023

초등교사가 꿈이지만 다른 나라도 가고 싶었습니다.

- 태국에서 영어 배운 나의 이야기 3

2023.4.17


대학교 1학년을 겨우 마치고, 휴학을 하고 2002년 4월부터 9월 즈음까지 태국 방콕에 거주하면서 영어를 배웠다.


생각해 보면 수능 점수에 맞춰 들어간 대학에서 어렵다고 적성에 안 맞는다고 딸이 방황하는 모습을 부모님은 옆에서 계속 지켜보셨을 것이고 고민을 하셨을 것 같다. 

그러게 열심히 공부했어야지 하며 한심해하셨을 수도 있다. 휴학을 하겠다고 했을 때도 안타까워하셨을 수 있다. 빨리 졸업해서 취직이나 하지...

하지만 그동안 공부나 하던 나는 부모님의 입장까지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만 우리 집은 부유하지는 않았기에 무의식적으로 어학연수를 가고 싶다거나 운전면허를 따고 싶다거나 이런 얘기는 잘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당시에도 대학에 가면 어학연수를 하며 영어를 배워 토익 같은 공인 영어점수를 따고 회화 실력을 쌓는 분위기였기에 부모님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나 고민하셨던 것 같다.

그때 한줄기 빛이 해외에 사시는 외삼촌이었고, 친하지도 않지만 특별히 나쁘지 않은 관계였기에 부탁을 하셨을 거다.


태국에 정착해서 살고 계신 외삼촌은 그 옛날 카투사(KATUSA) 출신이셨다.

그곳에서 도자기 그릇을 미국에 수출하는 일을 하셨다. 

그 도자기를 태국에서 만드는 건지 또 어딘가에서 수입하셨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직원이 두세 명인 작은 사무실을 운영하셨고, 미국으로 자주 출장을 가셨다.

오랫동안 외국에서 생활하셨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그렇게 친하고 돈독하고 그러진 않았는데

엄마께서 내가 이제 대학에 들어가고 외국 경험을 할 수 있게 간절히 부탁하셨던 것 같다.


나중에 듣기로는 외숙모는 반대하신 것 같다.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키워보니 그 심정이 아주 잘 이해가 간다.

그 당시 사촌동생들은 태국 외곽에 있는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한 명은고3이었고, 늦둥이 막내는 초등학생이었다. 3학년인가... 4학년인가.

한창 자식들 손이 많이 갈 시기에, 큰 딸은 심지어 대입을 앞둔 수험생인데! 

한국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대학생 조카가 온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외삼촌께서 강력하게 밀고 나가셨던 것 같다. 

삼촌은 가끔 나를 데리고 옛날이야기를 하시기도 하셨는데 그 옛날 삼촌의 삼촌이 철없고 가난했던 자신을 무시했던 일화를 들려주시기도 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조카에게 어떤 경험을 시켜주고 싶고 영어를 배우게 하려고 자신이 오랫동안 살아온 나라로 데리고 오셨던 것 같다.


그런데 불행히도 나는 철이 없었다.

내가 빠릿빠릿하고 싹싹하게 내 한 몸을 잘 챙겼더라면, 또는 사촌들과 친하게 잘 지내고 막냇동생 공부도 좀 가르쳐주고 그랬다면 부담이 덜 하셨을 텐데...

기숙사 생활 같은 것도 안 해본 내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숙소만 따로 얻었지, 밥과 반찬도 계속 얻어먹었다.

한국에서 보내주시는 돈으로 밖에서 한 끼 정도 사 먹는 게 다였다.


삼촌 가족의 아이들 중 첫째는 오랫동안 국제학교에서 공부를 해서 한국어 다음으로 영어가 제일 편한 언어였고, 태국어는 쓰지는 못하지만 자유롭게 듣고 말할 수 있었다. 둘째는 그 당시 초등학생이어서 한국어를 잘 못 읽는 거에 조금 위축되어 있었다.

가족 모두 교회를 열심히 다니셨는데 한인교회는 다니다 트러블이 좀 있으셨던 것 같고,

집 근처 미국인 교회를 다니셨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그 교회에 다니는 한국인 가정 두 그룹과 함께 가정예배를 보기도 했다.

가정예배를 볼 때는 당연히 자녀들이 영어를 하기 때문에 영어, 한국어 예배를 함께 병행했던 것 같다.


일요일에는 그 교회를 갔는데 사실 미국사람들의 말을 당연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설교 끝나면 밥 먹는 게 좋아서, 가끔 유치원 아이들 돌보는 게 좋아서 

그냥 다녔다.


그리고 몇 주간의 백수(?)의 생활을 끝내고

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어학원 같은 곳을 다녔다.

방콕에 BTS(지상철)를 타고 오후에 영어 수업을 들으러 갔다.

또 새벽에는 미국문화원에서 영어회화 수업을 들었다.

우리나라처럼 지상철은 정액권 같은 게 있었는데 사촌동생이 태국 학생 할인으로 한 달 치를 끊어주었던 것 같다.


태국 학생들과의 영어회화 수업은 사실 자신감을 갖기엔 좋았던 것 같다.

영어는 태국인에게나 한국인에게나 외국어이고, 나도 못하고 너도 못하고.

하지만 나는 외국인이고, 태국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고 말도 걸고 그랬다.

그런데 내가 그들보다도 영어 실력이 터무니없이 낮아서 대화를 해나가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조금 더 친해져서 같이 놀러 다니고 했으면 영어든 태국어든 더 늘었을 텐데...

한국에서처럼 학원 집 학원 집 그랬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까지 페이스북으로 연락하는 태국인 친구가 있다.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어학원에서 만났던 친구인데 그 당시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이었던 것 같다. 태국 이름이 꽤 길었던 것 같고, SUN이라는 닉네임을 썼었다. 굉장히 똑똑한 친구였던 기억이 있다. 예전에 서울에 놀러 와서 우리 집에서 1박 2일 지내고 갔던 기억도 있다. 엄마께서 끓여주신 조개탕을 아침식사로 맛있게 먹고 쇠젓가락을 선물로 주었었다. 그 당시 나는 다시 대학을 복학해서 다니고 있었고, 인사동과 그 친구가 다음날 묵을 숙소 가는 길 투어를 했었다. 그 이후 내가 태국을 다시 갔을 때 만나기도 하고 그랬다.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오랜만에 페이스북을 켰는데 그 친구에게 몇 년 전에 메시지가 와있어서 깜짝 놀랐다. 오래전에 온 메시지라 답장을 할까 말까 했는데 너무 반가워서 답장을 했고 그 친구의 안부를 알게 되었다.

지금은 일본에 있는데(메시지에서 한국회사와 일본회사를 고민하며 나에게 물어봄.) 결혼을 한 것 같고 아이는 캐나다 쪽에 유학을 하고 있는데 딸아이와 친한 친구가 한국인 아이라 

  "아빠도 옛날에 한국인 친구랑 태국에서 어학원도 같이 다니고 서울에 갔을 때 그 친구 집에 놀러 간 적도 있어!"라고 경험담을 말해주었다고 한다.


다시 태국에서의 생활로 돌아가서, 

집에서는 한국에서 가져온 영어 관련 문제집들(이보영의 120분 영문법!), 태국 서점에서 산 영어 소설책 등을 읽으며 영어 실력을 키워갔다. 언젠가는 학원에서 so far (이제까지)라는 단어를 못 알아들어서 집에 와서 라면을 먹으며 운 적도 있다.

다른 공부는 전혀 하지 않고, 영어 관련 서적만 읽고 영어만 써야 하는 환경이라 영어가 늘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어떤 문제집 같은 것을 1쪽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은 경험이 이때가 처음이다.)

사실, 태국어도 좀 늘었는데 식당 가면 늘 듣는 말들을 어떤 순간에 내가 자동적으로 뱉어내기도 했다! (환경의 중요성!)


삼촌 가족이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외국인들과의 사적인 만남도 가능했다.

함께 약속을 잡아서 수영장에서 논다던지, 선교활동을 한다던지, 합창을 배우러 다닌다던지.


영어를 배우러 갔지만 외국에 있다는 것 자체로 너무 행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살아가면서 처음 겪는 낯섦, 어려움이 무기력한 내 삶에 에너지를 채워주는 것 같았다.


국제학교에서 학교를 다니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도 영어와 태국어를 자유자재로 하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부모님도 외국에서 자리 잡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뭐 하지?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이런 잡다한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태국 방콕에 6개월 있는 동안 삶이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


한국 말고도 다른 나라가 있다.

다른 나라에는 정말 다양한 나라의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살고 있다.

다른 나라의 언어는 신비롭게 어렵고

많은 언어 중에 영어는 어떤 매개 역할을 해서 다른 문화의 사람들을 연결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그동안 한국의 학교와 학원, 과외 선생님이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아주 어렵고 낯선, 그렇지만 흥미로운 경험들.

즐겁고 슬프기도 한 와중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다양한 사람들에 대해 배웠다.


이 당시 나는 초등교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 어떤 일을 하고 싶냐고 물어보면

막연히 해외에 나가고 싶고 여행을 좋아하니까 여행 관련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면 여행 일이 많이 힘들다고 다들 염려했다.


그렇게 2002년 월드컵의 열기를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 채

(한 번은 삼촌 가족이 잘 가는 호텔 라운지에서 태국어로 중계하는 것을 보고 가족끼리 응원함 ㅜㅜ)

태국에서 6개월의 짧았던 생활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다시 적성에 맞지 않는 나의 전공으로 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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