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어린왕자에 유명한 대목이 있다. 양을 한 마리 그려달라는 어린왕자의 요청에 결국 귀찮아진 조종사가 상자 하나를 그려줬더니 그제야 어린왕자가 기뻐하더라는 이야기.
주입식 교육에 잘 적응했던 한 어린이는 그저 어린왕자는 상상력이 뛰어난 아이구나 라고 선생님이 가르쳐준 정답을 적었다.
시간이 지나서 상자 부분을 다시 읽었을 땐 어린왕자가 부러웠다. 상자의 의미가 반드시 상상력이 아닐지라도 상자를 통해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나와 달랐다. 내게 상자는 원하는 무엇이든 볼 수 있는 창이 아니라 그저 빈 상자였다. 그리고 내 상자는 비어있음을 인정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멈추고 말았다.
이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움직일 수 없음을 알았다. 나는 당황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누는 게 어려워졌고 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 게 힘들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변해버린 나를 숨겨야 하는 상황들이 너무나 벅찼다.
조금 더 이야기를 곱씹었다. 나는 이대로 빈 상자를 끌어안고 울고만 있어야 하는가. ‘어린왕자, 네가 그렇게 잘났냐!’ 그리고 곧 ‘어린왕자는 양을 그릴 줄 몰랐으니 조종사에게 양을 그려달라고 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어린왕자에게 본받아야 할 점은 상상력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하여,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인정하는 태도였을지도 모른다.
변해버린 스스로를 받아들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간헐적으로 이어진 글들은 고치고 싶어도 고칠 수 없는 당시의 나 자신이었고, 언제나 각자의 아픔으로 소리 지르고 있었다. 이 글은 내 안에 아무것도 든 게 없음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던 날들과 그 노력에 스스로 넘어져 버렸던 날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모든 게 변하던 순간에도 변하지 않았던 모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실은 그저 하소연에 지나지 않는 글일 수도 있고, 조금도 공감을 얻을 수 없는 잡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읽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변해버린 나로 살아야 함을, 그렇지 않고서는 영원히 자기연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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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고민 끝에 병원을 찾았다. 모든 스트레스는 불면으로 나타났고 이틀에 한 번 꼴로 자기 시작해서 잠이란 걸 잘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꼈을 때였다. 수면유도제를 처방받고 얼마 안 가 항우울제도 처방 받았다. 하지만 딱히 나아지지 않았다. 병원을 바꿨다. 수면유도제는 곧 수면제가 되었고 잘 듣지 않는 항우울제를 다른 항우울제로 바꿔보았다. 차례로 불안감과 무기력, 기분조절과 관련된 약이 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울과 불면을 겪으면서 나는 많이 변했다. 그리고 이 병을 기회삼아 글을 쓰기로 했다는 게 너무 흔한 발상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언젠가 치료되어야 할 질병을 가지고 나의 일부인 것처럼 이야기하게 될 상황이, 아무리 생각해도 좀 부끄럽다. 또 내가 가진 부족한 면들이 사실은 아파서 그런 거니 이해해 달라는 식의 글이 되어 버릴까봐 두렵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닥쳐 온 변화에 대해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이 글은 또한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 주인공인 글이기도 하다. 바로 옷이다.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이 걱정으로 변했던 때에도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하는 일에는 관대했던 것 같다.
옷을 예쁘게 입는 일이 병을 낫게 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지금 현재에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며 스스로를 위로할 수는 있었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늘어놓으며 나에 대해 설명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고 있다. 그건 나를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나를 설명하기 위함이 아닌 지금의 나, 한 때의 나, 지나고 보면 어색해질 나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딱 그만큼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딱 그만큼만 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