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끝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내가 번 돈으로 옷을 사기 시작했다. 그 전까진 항상 엄마와 함께 쇼핑을 했고 내 취향에 대해 고민하기 보다는 엄마 마음에 드는 옷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내 맘에 드는지가 제일 중요했지만 평범하고 무난한 스타일일 수밖에 없었다. 또 청소년기에는 또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교복을 입고 생활하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사복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생긴 이상, 매일 사복을 입게 된 이상 이전처럼 쇼핑하고 싶진 않았다. 제일 먼저 했던 건 인터넷 쇼핑몰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심심하면 들어가서 구경했다. 상품 사진을 일상 화보처럼 찍어 올렸기 때문에 눈이 즐거웠고, 여러 가지 코디를 연출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옷을 입으면 좋을지 참고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나와 모델 언니의 신체적 괴리감이었는데 이 문제는 아마 다시 태어나도 해결되지 않을 테니 살포시 넘어가는 것으로.
그때 당시의 나는 여성스럽고 귀여운 스타일에 매료되어 있었다. 스스로가 캐주얼하고 여려 보이는 모습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스타일로 옷을 사면 대부분 실패했다. 나는 키가 크고 골격이 큰 편인데 마른 편은 아니기 때문에 캐주얼까지야 어떻게 되지만 ‘여려’ 보인다던지 ‘귀엽게’ 보인다던지 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가오리핏’이라고 해서 몸통과 팔 부분이 이어지는 디자인이 유행이었는데, 모델이 입었을 땐 귀엽고 말라보이던 옷이 내가 입으면 소매는 엉거주춤한데다 가오리 부분 때문에 오히려 더 뚱뚱해 보였다. 귀여운 프린팅이 커다랗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어도 커다란 프린팅에 비해 날씬해 보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몸이 커보였다. 그 이후로는 깔끔한 디자인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본 디자인은 내가 예뻐 보인다거나 더 나아보인다거나 멋져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상체보다 하체가 통통한 편이라서 무난하게 입을수록 장점보다는 단점이 부각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사실 언제 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아마도 스물세 살 즈음이었던 것 같다. 좋아하던 인터넷 쇼핑몰에서 편해 보이고 예쁜 면 원피스가 올라 왔는데 가격도 괜찮아서 구입하게 되었다. 흰색 면에 도트 무늬였는데 도트가 크지 않고 자잘해서 멀리서 보면 그냥 흰색 면 원피스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무늬가 크지 않아서 더 활용도가 컸고, 허리에 고무줄로 라인도 잡혀있고 어깨와 팔 부분도 자연스럽게 반팔로 이어지는 디자인이라서 언제든 편하게 입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종아리 반을 넘는 길이의 롱~ 원피스였다는 점. 옷에서 길이감은 참 중요하다. 길이가 긴 원피스는 약간 드레스 같은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옷은 소재도 너무 평범하고 무늬도 크게 튀지 않고 노출이 있는 것도 아닌데 길이가 길어서 굉장히 여성스러워 보였다. 보통 여성스러운 옷은 입는 사람의 움직임을 한정시킨다. 그런 옷들은 라인이 잡혀있거나 길이가 짧거나 신축성이 없어서 불편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원피스는 보여 지는 효과에 비해 너무 편안한 옷이었다.
그때는 긴 옷을 입어보는 게 처음이었고, 아직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전이라서 어떻게 코디해야할지 잘 몰랐다. 우선은 원피스 하나만 입어보고, 뭔가 조금 밋밋한 것 같아서 카디건을 걸쳐보기도 하고, 재킷도 입어봤다가 그런 식으로 우선은 가진 옷들을 조합해서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다. 그렇게 발견한 내가 제일 마음에 드는 코디는 약간 빈티지하고 크기가 큰 원석으로 이루어진 목걸이에 원피스 하나만 입는 방법과 그 위에 살짝 라인이 잡힌 남색 재킷을 걸치는 것. 이렇게 재킷까지 걸치면 갖춰 입은 느낌이 난다. 그리고 캐주얼하게 입고 싶다면 원석 목걸이 대신 심플한 은색 긴 목걸이(가슴 중간이나 명치 정도까지 오는)를 하고 라인이 없는 니트 조끼를 입었다. 또는 골반에서 엉덩이를 덮는 길이의 살짝 늘어지는 검정색 니트를 위에 입어서 축 늘어지는 느낌을 살려 입기도 했고, 가을에는 비슷한 길이의 남색 트렌치코트와 함께 입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푸른색 계열을 좋아하고 피부에도 잘 어울려서 외투가 남색이 많다.)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입다보니까 길이가 긴 옷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키가 큰 편인 내게 잘 어울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물론 유행이 변하면서 기장이 긴 옷들이 많이 판매되기 시작한 덕도 있지만 롱원피스를 입어봤을 때 그제야 내가 좋아하고 나에게도 잘 어울리는 옷이 무엇인지 감을 잡았다.
오감으로 느끼는 감각과는 달리 관찰하고 구체화하고 실현해내는 감각은 무딘 칼을 갈아내는 것처럼 시행착오가 필요한 것 같다. 혹은 느끼는 것에서 실현하기까지의 과정을 역순으로 추론에 추론을 거듭해보거나. 어떤 것이 되었든 이 옷이 왜 내게 잘 어울리고, 어떤 점이 다른 옷과 다른지, 그리고 어떻게 입어야 좋을지 알기까지는 꽤 많은 부분에 기민하게 반응하고 예리하게 관찰하고 끊임없이 상상해 보아야 한다. 굉장히 귀찮은 일이기도 하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긴 하지만 뭔가 스스로 달라졌음을 느낀 이상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옷을 좀 예쁘게 입고 싶었고, 마음에 들게 옷을 입으면 기분이 좋았으니까. 그냥 기분 좋아지는 일을 기분 좋게 했던 것 같다.
흰색 도트원피스로 시작된 원피스 사랑은 무럭무럭 자라서 지금은 원피스가 10벌 정도 되는 것 같다. 더 있을 수도 있다. 바지나 치마보다 원피스를 선호한다. 한여름에 입는 원피스가 아니면 거의 일 년 내내 돌려 입을 수 있는 궁극의 돌려막기 아이템이라는 이유도 있고, 아무리 많아도 만족이 되지 않는 욕망의 분화구 같은 영역이기도 해서 그런 것 같다. 꽃무늬 원피스를 가장 좋아하고 자수로 된 원피스는 프린팅된 패턴보다 정성이 느껴져 좋아한다. 가을이나 겨울에 롱코트 안에 원피스를 입으면 코트자락 아래로 하늘하늘 살랑거리는 치맛자락이 보여서 겨울외투의 칙칙한 색감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 줘서 즐겁다.
원피스가 예쁘고, 활용도가 높다는 것 이상의 즐거움은 역시 치마나 원피스를 즐기는 사람만이 이해할 옷자락의 움직임이다. 원피스는 걸어갈 때 하늘거리거나 펄럭거리는 치맛자락과 내 다리의 움직임이 맞물리며 느껴지는 즐거움이 가장 큰 옷이다. 긴원피스를 입었을 때 기분이 달라지게 만드는 이유는 아마도 그런 옷의 역동성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느껴보면 알 것이다. 내 몸을 중심에 두고 이리 저리 흔들리는 치맛자락이 바람에 흔들리는 파도 같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