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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이 Apr 18. 2018

꽃  2

다음 날 평소와 다르게 아주 부지런을 떨었다. 점심 먹고 씻고 머리도 감고, 날씨도 정말 따뜻한 봄 날씨라서 꽃무늬 원피스 하나만 딱 입고 집을 나섰다. 이 원피스는 남색 바탕에 노란 꽃과 초록색 잎들이 프린트되어 있고 허리에서 허벅지로 내려가는 부분에 잔주름이 잡혀 있어 몸의 라인을 살려준다. 소매도 살짝 퍼지는 디자인이고 목 부분에는 리본이 있어 여성스럽고, 햇살 맑은 날에 잘 어울리는 원피스이다. 여기에 최근에 구입한 갈색으로 코팅된 선글라스를 쓰고 산뜻하게 출발했다. 


우선 화병을 사려고 다이소로 갔다. 가드닝 코너에 가서 화병들을 구경했는데, 한두 송이 정도 꽂을 수 있는 작은 화병밖에 없었다. 그래서 쓸 만한 걸 발견하지 못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주방용품이나 욕실용품 등이 있는데 차라리 유리병을 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층에 올라가서 유리병을 봤더니 우선 오일이나 물을 담아두는 길쭉한 유리병은 진공마개가 달려 있어서 꽃병으로 쓰기에는 좋지 않았고, 레몬청이나 꿀절임같은 걸 담아 두는 단지 같은 유리병은 높이가 너무 낮고 입구가 넓었다. 그렇게 돌아보던 중에 와인 잔이 있는 코너가 있었는데 거기서 딱 화병으로 쓰기 좋은 유리병을 발견했다. 바로 디켄팅에 쓰이는 유리병이었다. 디켄팅은 와인 침전물을 없애고 풍미도 더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 와인 병에서 다른 깨끗하고 면적이 넓은 병에 옮겨 담는 것인데 다이소에서 본 디켄팅 병은 입구가 좁고 바닥이 넓고 투명한 유리병이었다. 마음에 쏙 들었다. 두 번째는 아까 단지 모양의 유리병 코너에서 평균적인 디자인보다 좀 더 높이가 높고 한 쪽에만 손잡이가 달려있는 유리병을 선택했다. 하나는 조금 우아한 느낌으로, 다른 하나는 조금 귀여운 느낌으로 나름의 콘셉트를 생각하며 화병을 선택했다. 


다이소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 립스틱도 하나 구매하고 가글 용액도 샀다. 길고 긴 과정을 거쳐 드디어 꽃집에 도착했다. 어떤 남성분이 애인에게 선물할 꽃다발을 의뢰 중이었다. 그 꽃다발에 들어간 장미꽃도 꽃잎이 그라데이션으로 양 끝의 색이 다르게 물든 무척 예쁜 장미였지만 이미 나는 봐둔 게 있었다! (연보라색 장미!!) 남성분의 꽃다발이 완성되었고 곧 내 차례가 되었다. 집에 두고 볼 꽃을 사려고 왔고 화병 두 군데에 따로 꽂아둘 것이라고 했다. 하나는 원색 계열의 꽃들을, 나머지에는 빈티지하고 은은한 색감의 꽃들을 원한다고 설명했다. 원색 계열의 꽃은 어제 같이 봐 두었던 진한 빨간색과 진한 보라색 꽃이 있었는데 이름이 아네모네라고 했다. 줄기의 선이 예쁜 꽃이라서 집에 두고 보기 좋다고 설명해 주었다. 플로리스트와 상의하면서 조합을 만들었고, 그 결과 아네모네와 설유화를 함께 꾸린 한 묶음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그렇게 예쁘다고 한 연보라색 장미와 아이보리색 장미, 산호색의 카네이션과 안개꽃을 섞어 한 묶음을 완성했다. 





집에 오는 길 발걸음이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꽃을 한 아름 들고 가는데 한껏 들떠서 사진도 여러 장 찍었고 세상에, 이렇게 예쁘다간 큰일이 나지 않을까 싶었다. (주어는 쓰지 않는 걸로) 집에 와서 유리병을 닦고 묶어준 꽃들을 풀어서 나눠 꽂았다. 이리저리 각도를 틀어가며 사진을 찍고 잘 보이는 곳에 꽃병을 올려두었다. 역시 예쁜 건 옳았다. 예쁜 꽃이 집에 들어서니까 집 안이 환해 지면서 바닥에 굴러다니는 먼지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와서 청소도 하고 엄마가 시키고 간 빨래도 널고 그러고 나니 약간 탈진 상태가 되었다. 그날은 좀 쉬다가 시간이 되어 가게로 갔고 계속 기분이 좋았다. 집에 가면 예쁜 아이들이 기다린다는 마음에 들뜨기도 하고, 그리고 왠지 모르게 계획한 일을 멋지게 해낸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며칠을 아침마다 저녁마다 꽃들에게 인사하며 일상을 보냈다. 2-3일에 한 번은 아주 시원한 물로 갈아주고 줄기 끝도 대각선으로 잘라주며 보살폈다. 아네모네는 생각보다 빨리 졌고(열에 약해서 그런 것 같다.) 말려 보려 했지만 예쁘게 마르지 않아서 버리게 되었지만, 장미와 카네이션은 꽤 오래 봤다. 시드는 꽃들을 하나씩 빼다가 나중에는 네 송이가 남았다. 네 송이는 꺼내서 거꾸로 매달아 말렸다. 아직도 화명에 꽂혀있는 아이들은 알리움과 설유화이다. 알리움은 계속 새로운 몽우리가 터지고, 설유화에는 새순이 돋았다. 거꾸로 말린 네 송이의 꽃 중에 연보라색 장미는 진한 보라색으로 말랐고, 아이보리색 장미는 약간 노란빛으로 말랐다. 카네이션은 건조되는 과정에서 꽃이 오므라들었는데 꽃잎의 산호색이 더 진해졌다. 아름답게 터져 나오던 생명력은 다했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꽃을 즐기고 있다. 꽃이 시들 때마다 새로운 꽃을 사올 능력은 안 되지만 가끔은 이렇게 사치를 부리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소리 없이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꽃이 나의 공간 안에 있는 기쁨은 생각보다 컸고 만족스러웠다.


예전에 사기를 당해서 아빠의 사업이 망하고 쫓기듯 이사를 갔던 적이 있다. 대단지의 넓은 평수 아파트에서 살다가 조그마한 빌라로 옮겼을 때 나는 10살 남짓이었고, 솔직히 이런 작은 집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어려서 철딱서니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엄마는 그 당시 온갖 집안 문제로 스트레스가 엄청나셨다. 최근에 엄마는 그 작고 허름한 집에서 딱 하나 좋았던 게 집 근처에 라일락 나무가 많았던 거라고 말씀하셨다. 봄이면 라일락이 만개해서 바람이 불 때마다 집으로 라일락 향기가 들어왔는데, 방에 누워서 갑작스럽게 바뀐 상황 때문에 슬퍼하다가도 그 향기를 맡으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고. 자연은 조용하고, 바람에 소리와 향기를 전하지만, 언제나 생각보다 강하고 그걸 느끼는 사람에게 많은 메시지를 준다. 내가 집에 꽃을 두고 받은 위로와 엄마가 라일락에게 받은 위로에 차이는 있겠지만 조금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함께 적어 보았다. 때로는 꽃에 기대는 것도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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