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번째. 어서 이 밤이 지나가길
때론 어떤 기억들은 너무 또렷하고 선명하게 자국을 남긴다. 나의 의도 따윈 중요치 않다. 그때 그 일이 그랬다. 공포스러웠던 그 밤 그 기억이.
아비 노릇이라고는 일절 몰랐던 그도 간간히 아비 노릇을 할 때가 있었다. 동물의 세계에서 권위가 무언지. 힘은 이럴 때 사용하라는 것이라는 걸 그는 두 아이에게 똑똑히 보여줬다.
소년은 가끔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분노로 누이에게 표출했다. 아무 말 없이 떠난 엄마, 돌아오지 않는 아빠. 그나마 곁에 있는 누이마저 자신을 떠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늘 초조했고 불안했다. 가끔 어린 누이가 자신에게 잔소리라도 할라 치면 화가 치밀어 올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가 돌아오기 며칠 전 어느 날도 그랬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온 두 꼬마는 무슨 까닭인지 서로 치고받고 뒹굴며 격렬히 싸웠다. 소년의 주먹에 누이의 오른쪽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둘은 가끔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표현을 이런 식으로 했다.
세상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증오와 분노 경멸로 가득 찬 그의 시선은 퍼렇게 멍든 딸의 눈에 멈춰 섰다.
'이거 왜 그런 거야? 누가 그랬어? 네가 그랬니?'
드디어 아비 노릇을 할 때가 되었다 생각한 그는 앞에 놓여 있던 크리스털 재떨이를 집어 들었다. 재떨이를 집어 든 손은 그의 머리 위로 높이 올라갔다 소년에게로 향했다.
퍼... 어... 억...
단단한 시멘트 벽에 두꺼운 못을 한번에 박기위한 몸짓처럼 그는 있는 힘껏 재떨이를 내리쳤다. 육각 크리스털 재떨이의 한 모서리가 소년의 머리 가마 사이를 찍어 눌렀다. 놀란 소년은 양손으로 피가 흐르는 머리를 감싸곤 꿇은 무릎으로 뒷걸음을 쳤다.
그는 자기가 돌아 왔다는 증거를 이런식으로 남기곤 했다. 자신의 폭력이 합당할 만한 어떤 이유를 기어이 찾아냈고 두 아이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소년과 누이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찬 칠흑같이 어둔 이밤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를. 그가 제 풀에 지쳐 잠이 들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