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공포와 불안은 예측 할 수 없는 시간에 우리 앞에 나타나곤 했다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한채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간이 돼서야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곤 했다.
두 아이는 그가 돌아올 때마다 아이로써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경험해야만 했다. 그가 돌아왔으니 이제 배고픔을 해결하고 살 수 있다는 안도감과 함께 그로부터 생존을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감을 느꼈다.
극단의 두 감정은 두 아이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들 속에서 두 아이는 어떤 감정이 자신들을 위한 최선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의 의식은 필터링 없이 그가 쏟아 내는 모든 감정들을 무의식속으로 받아들였다.
밤늦게 돌아온 그는 배고픔에 지쳐 잠이든 두 아이를 흔들어 깨워 자신 앞에 앉혔다. 비몽사몽 정신없이 깨어난 두 아이는 몸에 베인 습관처럼 그 앞에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슬프게도 아이들의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대할 때 어떤 경계태세를 취해야 자신들이 살 수 있는 길인지를. 어떤 태도를 보여야 그가 기뻐하는지를.
그는 들어올 때부터 손에 쥐고 있던 불이 붙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선 크리스털로 된 육각 재떨이를 자신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까만 봉지 안에든 소주 한 병과 과자 몇 봉지를 주섬주섬 아이들 앞에 꺼내놓았다.
'가서 잔 좀 가져와라'
늘 그랬듯 두 아이는 자연스레 일어나 찬장에 있는 200cc 투병 유리컵을 꺼내와 그에게 건내곤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과자 봉지를 까서 두 아이 앞에 펼쳐놓은 뒤 어서 먹으라 말했다.
허기짐을 감출 수 없었던 두 아이는 그의 눈치를 한번 슬쩍 보고는 과자를 집어 먹었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려웠기에 먹으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잔에 따른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킨 그는 고개를 숙이고 크게 한숨을 쉰 뒤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시뻘게진 두 눈은 분노와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
당장에라도 무언가를 때려 부술 것만 같은 그의 두 눈이 두 아이들의 눈과 마주쳤다.
어떤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던 아이들이었으나 어느 날은 이러한 예상조차 할 수 있는 순간의 겨를조차 없을 때가 있다. 지금 이 순간이 그렇다.
두 아이는 손에 쥔 과자를 차마 입에 넣지 못하고 꿇은 무릎 위에 얌전히 놓아두었다. 아이들의 심장은 가파르게 뛰었다. 머리 부터 발끝까지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아이들은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그와 마주친 자신들의 두 눈과 고개를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방바닥을 향해 떨군채 바들바들 떨었다.
이유를 알 수 없고 형체를 알 수 없는 심연 깊이 자리 잡고 있던 파괴적인 분노가 그의 몸 밖으로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무슨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공포의 밤은 또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