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배고픔과 외로움은 한꺼번에 찾아 왔다.
'얜 은숙이, 이 언니는 은숙이 언니였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나보다 한 두 살 많았던 것 같았는데. 여기 순희도 있네. 순희가 말을 좀 더듬었었지. 근데 웃는 게 너무 해맑았었어. 사진 속에서도 웃고 있는 거 봐. 아. 얘는 누구였더라... 사진 찍은 여기가 여미지 식물원이지 아마.'
1992년 5월 2일.
000의 동거인으로 동생과 내가 누군가의 손에 이끌러 생판 모르는 이들과 삶을 공유하기 시작한 첫날.
000의 동거인이 됨과 동시에 나에겐 여러 명의 언니, 오빠, 동생들이 생겼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우리. 무엇이 그리 신났던 걸까. 사진 속 우리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의 머리를 기대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와 동생의 보호자였던 그와 그녀는 1990년 서로에게 안녕을 고했다. 그가 나와 동생을 맡기로 했다. 그녀가 어떤 이유로 우리 둘을 두고 떠났는지 아직도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녀가 떠난 지 벌써 30년. 지금껏 그녀에 대한 어떤 소식도 들은 적이 없다.
그녀가 떠난 후 그의 삶은 처참히 망가졌다. 그는 거침없는 파도를 이겨낼 힘도 자신도 없었다. 그럴 힘이 있었지만 운이 그를 내쳐버렸던 걸까. 하지만 처음부터 그럴 마음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의 인생이 합리화되는 게 싫다. 이렇게라도 생각하면서 미워해야 가슴속 응어리가 좀 풀릴 것 같기에.
그는 두 아이를 돌보는 법을 몰랐다. 어떻게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는 매일같이 밖으로 돌았다. 어떤 연유로 무슨 일로 헤매었는지는 모른다. 그 역시 그녀처럼 우리에게 그 이유를 말해준 적이 없었다.
그가 두 아이에게 천 원짜리 몇 장 쥐어 주는 날은 몇 날 며칠 동안 집에 못 들어온다는 신호였다. 처음엔 알지 못했다. 그 돈이 끼니를 해결하라는 뜻이었는지. 철부지 두 아이는 그가 쥐어준 돈으로 학교가 끝나면 문방구에 들러 군것질을 하고 오락실을 갔다.
두 아이는 그가 몇 번이나 그렇게 돈을 쥐어주고 들어오지 않았을 때 알았다. 그 돈이 자신들의 배고픔을 달래줄 돈이었음을.
그가 한참을 오지 않다 가끔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미안한 마음에서인지 양손에 먹을 걸 잔뜩 사서 들어오곤 했다. 까만 비닐봉지엔 자신의 아픔을 달랠 술 역시 빼놓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잠시 서울에 다녀오겠다고 나간 그는 한 달, 두 달이 지나도록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집엔 먹을거리가 점점 떨어져 갔고 전기마저 끊겨버렸다. 남은 거라곤 쌀통 밑바닥이 보이는 생쌀뿐이었다. 허기를 이기지 못한 두 아이는 생쌀을 그냥 씹어 먹었다.
하도 먹어 먹는 법에 도가 텄는지 이가 아프고 턱이 아파올 때면 쌀을 입안에 넣고 침으로 불린 뒤 씹어 먹기도 했다. 생쌀을 오래 씹으면 씹을 수록 단맛이 난다는 걸 두 아이는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쌀이 바닥이 나고 더 이상 먹을 게 없을 땐 동네 밭에서 무, 감자를 서리해 먹곤했다. 멋모르는 두아이는 살아야 한다는 본능을 대하는 법을 그렇게 스스로 깨쳐가고 있었다.
그렇게 두 아이가 외로움과 어둠에 익숙해져 갈 때쯤 드디어 그가 돌아왔다.
# 글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실제 이름이 아닙니다. 혹시 몰라 가명으로 대체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