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밤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이유
누구나 오밤중 술기운을 빌어 헤어진 연인에게 '자니'라는 문자를 보내거나 어스름한 새벽 센티해진 감정을 글에 얹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느 땐 밖으로 흘러넘치는 감성을 주체하지 못한채 손가락들이 뇌의 컨드롤을 벗어나 멋대로 활보하기도 한다. '자니'라는 문자를 쓰던 손가락은 어느새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고, 센티해진 감정의 흐름대로 써 내려간 글은 발행 버튼을 꾸욱 눌러 나를 세상에 흩뿌린다. 제 할 일을 마친 두 손은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비빈다. 몽롱해진 의식은 무의식 속으로 빨려 들어가 또 다른 이야기를 짓는다.
다음 날 아침.
땅속으로 꺼질 듯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켜다 문득 간밤에 벌어진 사건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기억이 날듯 말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순간 지난밤 사건의 단서가 휘리릭 전두엽을 지나친다. 아.... 생각난다...... 귀가 빨개지고 볼이 화끈거린다. 어젯밤 허튼짓을 한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성찰 모드에 돌입. 간밤 힘이 몇 배나 세진 감성이 이성을 짓누르고 나에게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건가? 들숨 날 숨을 내 쉬며 벌렁벌렁 나대는 심장을 달래 본다. 핸드폰을 들어 사건의 전말을 확인한다. 분명 이 방안에 나 혼자뿐인데 세상의 모든 눈이 나를 향하고 있는 것만 같다.
아. 쪽. 팔. 려.
밤의 이야기를 한낮에 꺼내보는 일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낮은 밤보다 세심하다. 모든 빛이 구석구석을 비춘다. 이래서 낯부끄럽단 말이 생겨난 걸까. 2019년 카카오에서 주관하는 <크리에이터스 데이>라는 행사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곳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 강이슬 작가님이 글 쓸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했다. 바로 글마귀. 감성이 센티해질 때 쓴 글은 절대! 바로 발행해서는 안된다고. 새벽 감성과 술기운에 놓인 상태는 글 마귀가 찾아오기 딱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밤에 새벽에 술기운에 감성적인 인간이 되어 그 모든 걸 까발리고 싶은 충동에 휘둘리는 것인가?
밤과 새벽은 세상 풍파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한 겹 두 겹 걸친 가면와 옷가지를 한 올 한 올 벗길 수 있는 순간이다. 어둠 속에선 발가벗겨진 몸뚱이가 전혀 부끄럽지 않다. 낮동안 내가 어떤 가면을 쓰고 어떤 옷을 입었는지 묻지 않는다. 마치 엄마 뱃속 양수 안에 있는 태아처럼 날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감싸 안을 뿐이다.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이해한다며 여기서는 편히 쉬어도 괜찮다는 자장가를 귓가에 속삭인다.
이러니 내 모든 걸 어찌 드러내지 않을 수 있으랴.
세밀한 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밤의 눈동자. 그저 명암을 통해 형체를 확인할 뿐. 밤의 눈동자를 통해 나를 바라 볼 때야 말로 그 어떤 편견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날 것의 나를 보듬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밤과 새벽의 감성을 좋아한다. 그때 쓰는 글이야 말로 솔직한 나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니까.
하지만 아직도 낮의 눈동자가 밤의 눈동자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낮 부끄러움을 감당할 자신은 없다. 물론 이것도 한 순간일 뿐이고 사람들 역시 이런 나의 순간을 금세 기억에서 지워버릴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낯부끄러운 밤의 눈동자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