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공간에서 상상하는 타인의 사생활

어릴 적 그곳이 그립다

by Ikukuna

6개월간의 독서모임 여정이 끝을 맺었다. 이사도 하고 독서모임도 끝이 나고. 그래서일까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오늘은 늘어지게 자야지 했는데 아침부터 윗집에서 드르륵드르륵 전동 드릴 소리가 들렸다. 잠에서 깰락 말락 할 때 상당히 기분 나쁜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아주 낡고 낡은, 곧 허물어지기 직전의 아파트에 내가 들어가 살고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곧 주저앉을 것 같은 계단. 아파트 밖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은 형태라고는 알아볼 수 없는 폐기물 자제들과 쓰레기 더미들이었다. 그런 공간에 홀로 있는데 갑자기 침입자가 우리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침입자를 보고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저리 가! 야~!!!!! 으악!!!" 꿈속에서 소리를 친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잠결에 진짜 소리를 질러 버렸다. 얕은 잠에 빠진 상태여서 그랬나 나의 고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그때 윗집에서 '드르륵드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이전에 살던 집은 지하 포함하면 총 4층으로 되어있는 건물이었다. 총 8세대가 살았다. 내가 사는 라인 지하에는 젊은 청년이 살았다. 그는 겨울밤만 되면 노래를 불렀다. 시간도 정확했다. 밤 10시. 그가 선택한 노래는 박효신의 '눈의 꽃'이었다. 박효신의 동굴 같은 목소리를 흉내 내기 위해 목청과 배에 힘이 힘껏 들어갔겠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올해의 첫 눈꽃을 바라보며 함께 있는~" 그의 노래 시간은 일정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엔 1시간, 컨디션이 좀 좋아 힘이 남아도는 날엔 2시간을 내리 연창 하는 것 같았다. ‘아니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어. 밤마다 노래를 부르고 지랄이야. 지가 무슨 박효신인 줄 아나 봐. 왜 겨울밤만 되면 저 노래를 부르는 거야. 미친놈이네 진짜. 확 고성방가로 신고해버릴까?!' 핸드폰을 들고 112를 누를까 말까 고민을 한두 번 한 게 아녔다. 나만 저 소리를 싫어하는 게 아닐 텐데. 왜 다들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걸까. 정말 미친놈이라 건드리면 이상한 짓 할까 봐 그런가? 오만가지 상상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결국 지하 남자를 그냥 정신 나간 미친놈이라 생각하고 그냥 내버려 두자 하고 말았다.




겨울밤엔 지하 청년. 한여름 날엔 3층 아주머니의 고성방가와 1층 아주머니 댁의 두 딸들이 고성방가 대회에 합세했다. 3층 아주머니는 강원도 사투리를 썼다. 더운 여름밤 에어컨을 틀긴 뭐 한 그런 더위엔 밤늦게까지 창문을 열어 두고 생활을 하셨다. '띠리리리리' 최고음으로 맞춘 전화벨 소리가 바로 아래층 우리 집까지 들린다. "어~그래 ~어어~아니 그 있잖니~맞다! 어어 거기 언니가 말이야~!' 귀가 잘 안 들리시나. 목소리가 세상천지를 뒤흔들 정도로 떠들썩하다. 아주머니 목소리만 들어도 누가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여자들의 수다는 한 번 시작하면 웬만해서 끝을 보기 힘들다는 걸 이 아주머니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도무지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가 아닌 코리아 나이트가 바로 이거구나 싶었다. 저 이야기는 언제 끝이 나려나. 집에 에어컨이 없던 나는 결국 열었던 이중창을 닫기에 이른다. '저 소음을 듣고 멘탈이 나가느니 차라리 쪄 죽는 게 낫겠어.' 이뿐만이 아녔다. 김장철이 되거나 명절이 되면 '쿵쿵쿵' 소리가 우리 집 천장을 뒤흔들곤 했다. 대체 저 소리가 뭔지 궁금해서 살짝 올라가 본 적이 있었다. 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절구엔 마늘을 수북이 넣어 나무 방아로 마늘을 있는 힘껏 내리찍고 계셨다. 밑에 뭐라고 깔고 하시지..... 맨바닥에 절구를 놓고 방아를 아래로 있는 힘껏 내리 꽂고 계셨다. 편하디 편한 믹서기가 있는데 왜 굳이 저걸로..... 저러니 우리 집 천장이 들썩거렸지...... 청소기는 왜 또 밤 10시만 되면 돌리시는지. 대체 왜 그러나 싶어 따지러 올라가려는 걸 몇 번을 참았다. '그래 지하 청년처럼 미친 사람이다 생각하자. 개념 자체가 없으니 매번 저러지. 그래 괜히 이상한 사람 상대했다가 별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 참자. 릴랙스하고 귀에 이어폰을 꼽자.'




다음은 1층 아주머니 댁. 여기는 두 딸이 주말이면 친정집에 온다. 이 집도 늘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생활한다. 한 겨울 찬바람이 불 때를 빼곤. 이 집의 두 딸들도 3층 아주머니 못지않게 목소리 데시벨이 높다. 가족들끼리 모여 기분이 좋은 건 이해한다. 충분히. 하지만 문 좀 닫고 떠들면 무슨 일이 생기나. 주말 밤마다 술을 한 잔씩 하는지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우하하하 하하 아니 엄마! 이 남자가 말이야. 어쩌고 저쩌고. (티브이를 보는지) 아니 쟤는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저러니깐 한눈을 팔지 어쩌고 저쩌고" 고성은 자정을 넘어 새벽까지 이어진다. 이 집도 명절엔 끝이 나지 않는 코리안 나이트가 열린다. 끝나지 않는 어쩔 수 없이 귓가에 들리는 이야기 덕에 이 집의 사정과 감정상태가 어떤지 소리만 들어도 다 알 수 있었다.




이전 집에선 사계절 내내 개성이 강한 캐릭터들의 고성을 접하며 살았다. 소리만으로도 한 사람의 인생을 짐작할 수도 있구나라는 걸 그곳에서 알았다.


그곳에서 소음에 어느 정도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녔다. 오늘 아침 윗집의 소음과 나의 꿈이 뒤범벅되어 기분 나쁘게 잠에서 깬걸 보니 말이다. 기분 나쁘게 만드는 일들은 늘 새롭게만 느껴진다. 특히 소음은......


'그래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짐 정리하느라 그런 걸 거야. 아님 가구 조립하나 보지 뭐. 아님 인테리어를 새로 하느라 그렇겠지'라며 윗집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휴식이 필요했던 나는 결국 자연스레 내 귀에 들리는 소음에 신경 쓰느라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타인의 상황을 이해한다는 건 어떤 걸까? 게다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처지를 이해한다는 건 얼마 큼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새장 같은 아파트.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살고 있지만 윗집의 소음에 신경 쓰고 나 역시도 아랫집에 나의 어떤 생활 소음들이 피해를 줄지 몰라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무척이나 싫단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에서 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고층 건물이라곤 별로 없던 그때. 단층인 우리 집. 옥상에만 올라가도 제주 바다 수평선이 보였고 한라산이 보였던 그곳. 옥상에서 마음껏 뛰놀아도, 집안에서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해도, 방바닥에서 딱지치기를 해도 구슬치기를 해도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움직이고 떠들 수 있었던 공간들. 그 공간들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아홉 시가 넘어 열 시를 향해가는 이 시간에도 윗집은 무슨 볼일이 그렇게나 많은지 우당탕. 드르륵. 쿵, 쾅. 소리를 내고 있다. 내 공간 안에서 소리만으로 상상하게 되는 타인의 사생활. 그들의 삶을 삐뚤어지게 만드는 나의 못된 상상들.


경제적 독립을 이루어 제주에서 살던 단층집을 언젠간 꼭 사리리고 다짐한다. 어릴 적 제주에서의 삶처럼 온전히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소음을 마음껏 낼 수 있는 공간에 머물 수 있는 그날을 위해. 조금만 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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