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첫사랑.
누구에겐 아련하고 애틋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누구에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처절한 사랑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는 사랑.
내 첫사랑은 어땠냐고? 난 후자에 속한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바로 내 첫사랑.
왜 기억하고 싶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내 첫사랑에는 내가 없었으니깐.
그렇다. 말 그대로 난 없었다. 그땐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난 내가 상대방을 무척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땐 그렇게 믿었는데 왜 이제 와 지금 ’그땐 난 없었다'라고 말하는 거냐고?
당시 사랑을 주는 나는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분별없고 자기 파괴적인 사랑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소멸되었다. 그땐 몰랐다. 사랑이라는 건 무조건적인 희생이 바탕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라 당연히 생각했다. 내게 진정한 '사랑'에 대해 가르쳐 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당시만 해도 내가 소멸하면서까지 사랑을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적절한 때에 주지 않는 것이 적절치 않은 때에 주는 것보다 더 인정을 베푸는 것이라는 점을 배워야 했다. 또한 스스로 돌볼 능력이 있는 사람을 돌보기보다는 독립심을 길러주는 것이 오히려 사랑이라는 사실도 배워야 했다.
<아직도 가야 할 길> P.161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저자 스캇펙은 정신과 의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강연자 영적 안내자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다. 어느 날 그에게 한 목사님이 상담을 받기 위해 찾아온다. 부인은 만성 우울증에 시달리고 두 아들은 대학을 다니다 그만두고 집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가족 모두가 병이 났는데도 그 목사는 처음에 자기의 역할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했다. 목사는 아버지로서 온 힘을 다해 가족들의 문제를 다루려고 했다. 자신이 깨어 있는 동안에는 항상 가족들만을 생각했다. 상담 끝에 저자는 목사가 아내와 아이들에게 온 힘을 다해 그들의 욕구를 채워 주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스캇이 목사에게 물었다.) 밤 낮 그들을 위해 자신을 그렇게 내동댕이치는데 지치지 않았나요?
물론 지쳤어요. 그런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들을 내버려 두 자니, 너무 안쓰러운걸요. 나는 염려가 대단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어야 하는 한 절대로 방관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주 명석한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랑을 갖고 있고, 가족을 염려합니다.
(목사는 대답했다. 가족들이 너무나 안쓰러운데 어떡하느냐고)
<아직도 가야 할 길>
목사의 아버지는 유명하고 명석한 학자였지만 알코올 의존증 환자였다. 그리고 여자를 좋아해서 가족에게 관심이 없었다. 목사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가족을 등한시했다. 목사는 자라면서 아버지처럼 무심하고 무관심하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 또 다짐을 했다. 그는 자신이 사랑받고 인정 많은 사람으로서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노력을 했다. 그런 이미지를 갖기 위해 목회를 비롯한 여러 일들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시간들을 쏟아부었다. 그는 자신이 가족들을 아이처럼 대하고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하소연했다.
달리 어떻게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아버지께 반발해서 가족들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갑자기 사랑하기를 그만두고
나 자신을 나쁜 놈으로 만들 수는
없잖습니까?
나도 첫사랑을 하기 전까진 알지 못했다. 가정을 돌보지 않은 부모님을 닮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살았던 것들이 자기희생이라는 것으로 변모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 부모를 닮지 않기 위해 강박에 둘러싸여 살았다. '나는 절대 저렇게 이기적으로 살지 않을 거야.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될 거야'라고 생각했었다.
'나'라는 사람은 없는 채, 내 무조건적인 사랑이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동생이었다. 나도 사랑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뒤로 한채 동생에게만큼 내가 부모 역할을 해줘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가족에 대해 희생을 하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내 몸에 자연스레 베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성인이 된 내게도 사랑의 기회가 다가왔다. 이 사랑을 선택한 계기 역시 단순했다. 그 사람의 안쓰러운 부분들만 눈에 들어왔고 그에게 필요한 부분들을 내가 채워줘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세상 모든 염려는 그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그와 만나면서 나의 욕구보다는 그의 욕구에 맞추는 부분들이 점점 커져갔다. 그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은 모두 주려고 했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믿으면서 마음 한편에는 외로움이 점점 커져만 갔다. 함께 있어도 즐겁지 않았다. 내가 즐겁지 않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표현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그에게 난 '나쁜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자신의 책임을 거부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무언가를 할 때에는 그것을 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고, 그것이 우리를 가장 만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다른 사람을 위해 한다 해도 사실은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행위다.
<아직도 가야 할 길> P.165
당시 난, 내가 사랑이 무척 고팠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억지로 숨기려 했던 것 같다. 내 안에 결핍된 사랑을 채우기 위해 자기희생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고, 사랑을 했지만 결국 그 선택은 내 존재를 더욱 궁핍하게 만들 뿐이었다.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기쁨을 안다. 순수하게 사랑하는 순간의 이유는 우리가 사랑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중략) 사랑은 자신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이것은 자기희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확대인 셈이다. 순수한 사랑은 자기를 채워나가는 활동이다. 사실 그 이상이다. 그것은 자신을 위축시키기보다는 확대시키고, 자신을 메마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한다.
< 아직도 가야 할 길> P.165~166
저자는 사랑이란 행동이고 활동이지 느낌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랑의 느낌은 애착을 수반하는 정서이다. 애착 과정을 통해 상대가 중요하게 인식되는 것이라고 한다. 애착을 하게 되면 사랑의 대상인 상대방에게 자신의 모든 에너지가 몰입된다. 이렇게 에너지가 몰입된 관계를 애착관계라고 한다.
이러한 관계를 동시다발적으로 가질 수도 있는데 이를 '애착관계들'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사랑하는 대상이 중요하다는 느낌을 잃게 되면서 대상에게 투여된 에너지를 빼내는 과정은 '탈애착'이라고 한다. 우리가 사랑이 느낌이라고 믿는 오류는 이 애착과 사랑을 혼동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뚜렷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첫째. 우리는 생명이나 영혼의 유무에 관계없이 어떤 대상에 애착한다.
둘째. 다른 인간에게 애착한다는 것이 대상의 영적 발전을 위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의존적인 사람은 애착 대상이 영적으로 발전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셋째. 애착의 강도는 지혜나 헌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넷째. 끝으로 애착은 떠다니는 것, 순간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이와 반대로 진정한 사랑은 책임 있고 지혜로운 행동을 내포한다.
나는 사랑을 정의 하기를,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키려는'의지'라고 했다. 진정한 사랑은 감정보다는 '의지'에서 나온다. 사랑의 느낌에는 제한이 없지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누구에게 집중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고, 그를 향해 사랑의 의지를 집중해야 한다. 참 사랑은 사랑으로 인해 압도되는 그런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감 있게 심사숙고한 끝에 내리는 결정이다.
<아직도 가야 할 길> 중에서
자신을 확장할 때, 한 발자국 더 내딛고 1미터를 걸을 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게으름이라는 타성이나 두려움의 저항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자신의 확장이나 게으름의 타성과 싸우면서 움직여 나가는 것을 노력이라고 한다. 두려움에 맞서 나아가는 것을 용기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사랑은 일종의 노력이나 용기다. 특히 사랑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시도하는 용기다.
<아직도 가야 할 길> P.172
내 첫사랑에는 '성장'이라는 말이 부재했었다. 우린 서로가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어떻게 생각하면 첫사랑을 향했던 나의 자기희생이 서로의 성장을 가로막았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때 내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았다면,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였단 것을 알았더라면 '희생'이라는 장작불에 '나'를 내던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방적인 사랑은 없었으리라.
우리의 사랑은 나 혼자만 앞서가는 사랑이 되어 갔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나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들었고 우리가 소통하는 시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저자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관심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관심을 갖기 위해 크게 노력해야 할 것 중 하나는 바로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잘 듣는다는 것은 관심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고 반드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의지를 발휘해 정해진 타성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해야겠단 생각을 그땐 왜 못했을까? 서로가 사랑하고 있다는 단지, 그런 느낌 하나만으로 우린 가짜 사랑에 서로를 옭아매고 있었다.
첫사랑과 헤어지고 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할 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도 그도 제대로 애착 형성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을 시작했다. 우린 어떻게 사랑을 주고받아야 하는 건지 몰랐다. 그랬기에 한쪽은 무작정 희생하는 사랑을 선택했고 그 사랑을 받는 상대는 희생적인 사랑을 받는 것이 처음부터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다. 만약 우리 두 사람이 제대로 된 애착 형성을 이룬 상태에서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사랑의 느낌만으로 유지하려 했던 첫사랑을 통해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만약 내가 그때 그런 사랑을 하고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온전한 '나'로써 존재하지 못하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에 실패하고 나서야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사랑의 느낌 하나만으로 그것이 온전한 사랑이라고 믿으며 평생을 지냈을지도 모른다.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을 자발적으로 실천하면서, 나라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 의미 없는 빈 껍데기로 남아 존재했겠지. 그리고 나의 삶과 맞대면할 용기도 마주하지 못했겠지.....
만약, 앞으로 내게 또 다른 사랑의 모험이 시작된다면 그땐 서로를 확장시킬 수 있는 노력을 함께 하고 두려움에 맞설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그런 사람과 사랑을 하고 싶다.
나와 너, 그리고 세상에 대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언젠간 꼭 만날 수 있길 바라며.
<참고도서: 아직도 가야 할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