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마지막으로 그리지 않을꺼야.
국민학교 시절( 제가 졸업하고 나서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네요. 이러고 보니 나이를 꽤 많이 먹은 것 같이 보이네요. 많이 먹긴 했죠.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만...)엔 그림 그리는 걸 꽤나 좋아했었어요. 교내 사생대회도 나가기도 했고 학교 외의 사생대회도 학년 대표로 몇 번 나가기도 했죠. 하지만 상은 타본 적은 몇 번 없었어요.(저보다 뛰어난 녀석들이 엄청 많았나 봅니다. 하하하)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릴 적 좋아하던 것들과는 거리가 많이 멀어졌어요. 언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나 싶을 정도로.
어릴 땐 무얼 보고 따라 그리는 일도 식은 죽 먹기였고, 상상해서 그림을 그리는 일도 어렵지 않았어요. 생각이 많아진 어른이 되어버려서 그런 걸까요? 지금은 보고 따라 그리는 것도 쉽지 않고, 생각 속 이미지들을 그려 내는 일은 훨씬 더 어려워졌네요.
20대 후반 성당에서 청년회 활동을 하던 어느 날이었어요.(지금은 성당을 안다니는 무교인 이예요)예수님이 아주 활짝 웃고 있는 귀여운(??) 이미지를 따라 그리고 있었어요. 커다란 스케치 북에 하늘빛 찰랑 거리는 옷을 입고, 갈색의 살짝 웨이브가 진 중단발의 머리칼에, 너무 활짝 웃고 있어 입꼬리가 귀에 걸린,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모습을 그리고 있었어요. 예수님의 모습이 거의 다 완성이 되어 가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눈만 그리면 되었어요. 하지만 그림 속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데도 눈을 좀처럼 그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렸다 지웠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어요. 눈을 잘 따라 그리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림 속 환하게 웃는 얼굴과는 정 반대의 얼굴로 그려지고 있는 거예요. 슬픈 눈이 되었다가 다시 지우고, 또다시 그린 눈은 화가 나있었고 그래서 다시 지우고, 다시 또 그린 눈은 날 바라보는 게 아니라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고... 도저히 웃는 눈을 가진 얼굴을 그릴 수가 없겠더라고요. 결국은 포기하고 다른 친구에게 눈만 그려 달라고 부탁했어요.
어른이 되고 나고 그림을 자주 그리진 않았지만 가끔 사람 얼굴을 재미 삼아 그릴 때에도 눈을 그리는 일이 어려웠어요. 늘 제일 마지막으로 그리게 되는 것이 눈이었어요. 어느 땐 눈을 그리지 않고 내버려 둔 적도 있었어요.
'왜 난 얼굴을 그릴 때 눈을 먼저 그리는 것이 어려울까? 왜 제일 마지막에 눈을 그리려고 하는 거지?'
어릴 적 따스한 눈길을 받아 본 기억이 별로 없어서일까? 분명 없진 않았을 텐데.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어요. 따스한 기억도 많았지만 날카로운 눈으로 날 쏘아보던 누군가의 눈빛이 떠올랐어요. 그 눈빛이 어렸던 제겐 너무도 무섭고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가끔 분노에 차올라 화를 내던 내 아버지의 서슬한 눈빛이 제 어린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었던 거예요. 그 눈빛이 제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너란 녀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귀찮은 녀석이야. 저리로 가버려. 왜 날 힘들게 하니?!'
그 때 그 눈을 잠시라도 마주쳤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였었어요. 아마 그 뒤부턴 그런 눈빛이 조금이라도 감지되는 것 같다 싶으면 얼른 시선을 피하고 함께 있는 자리를 뜨곤 했어요.
그 뒤부터였던 것 같아요. 평화롭고 안정된 분위기와 다른 어떤 이상한 느낌이 감지될 때 나와 함께 있는 누군가의 눈을 바라보기가 어려워진 게 말이에요.
아직도 가끔은 가까운 이들이 아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약간의 거리감이 있는 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 눈을 마주치는 게 어려울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아 내가 지금 눈을 맞추지는 걸 또 어려워하고 있구나. 괜찮아. 이 사람은 날 헤치려고 온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안심해도 돼. 천천히 눈을 들어서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자'라고 자신에게 이야기를 해줘요. 아무도 모르게. 손에서는 식은땀이 나고 가슴은 콩닥콩닥 뛰지만 그래도 혼자 나름 애써 노력을 하죠. (이젠 제법 아이컨택도 하며 대화도 잘하는데 지금 다시 누군가의 얼굴을 그려보라고 하면 눈을 잘 그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래도 전 보단 훨씬 잘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수님의 눈을 그리기 어려워 한 뒤로 몇 번 더 사람의 얼굴을 그려볼 때마다 눈을 그리는게 어려웠어요. 어쩌면 타인의 눈을 마주하기가 어려워 그랬던 게 아니라 내가 바라보는 나의 눈을 그리기 어려웠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요.
나의 눈으로 똑바로 나를 응시해야 하는 일이 버겁다는 걸 알기에 피하고 싶어 그랬던 것일지도...
저에 대해 생각을 잠시 멈추겠다고 바로 어제 마음먹었는데 결국 제 자신에 대해 깊이 또 생각하게 되어버렸네요. 어쩔수 없나봐요. 나를 생각하지 않는 건 제겐 눈을 그리는 것 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인것 같네요.
누군가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바라보다 문득 옛 기억이 떠올라 이렇게 또 저에 대해 몇 자 적어봅니다.
제 자신에 대해 좋은 점을 알아챘을 땐 참 기분이 좋은데 이런 모습들을 알아버렸을 때는 기분이 묘합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 할 약한 모습을 바라봐야 하니깐요.
나이 꽉 찬 어른이지만 아직도 더 많이 커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죽을 때까지 미성숙한 어른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도 어제 보다 오늘, 오늘 보다 내일의 제가 더 나은 모습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 참 다행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