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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kukuna Jul 30. 2019

잠깐,
거기까지가 딱 좋은 것 같아요

너와 나 사이


# 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



여기 두 김 씨가 있습니다. 남자 김 씨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한강에서 자살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자살은 실패로 끝나고 한강 밤섬에 표류하게 되죠. 밤섬을 탈출하려 온갖 방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아무도 그를 구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탈출을 포기한 그는 밤섬에서 고립된 채 생활하게 됩니다. 밤섬에서의 생활은 힘겨웠지만 세상에 있었을 때의 고통과 빚으로부터의 자유를 느끼며 밤섬에서의 생활에 적응해 가기 시작합니다.





또 한 명의 여자 김 씨. 그녀는 한강 밤섬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몇 년째 자신의 방안에 갇혀 지내고 있습니다. 자의적인 고립이죠. 그녀의 방은 쓰레기 더미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빠가 출근을 하고 나면 일어나고, 퇴근하고 돌아오면 자고, 엄마가 외출을 할 때만 화장실을 갑니다. 그녀의 취미는 달 사진 찍기와 미니홈피를 꾸미는 일. 인터넷상에서 그녀는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이런 그녀가 세상과 나름 소통하는(?) 날이 있는데요. 바로 민방위 훈련이 있는 날입니다. 훈련 때문에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는 세상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밤섬에 고립된 남자 김 씨를 보게 된 여자 김 씨는 호기심에 그를 계속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여자 김 씨는 남자 김 씨에게 메모를 적어 병에 담아 밤섬에 보내기 위해 외출을 감행합니다. 헬멧을 쓰고 말이죠. 몇 달 뒤 그 쪽지를 발견한 남자 김 씨는 밤섬 바닥에 크게 글씨를 쓰고 여자 김 씨와 소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섬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고, 밤섬에서 꺼내주려 하지만 그는 밤섬을 떠나기를 완강히 거부합니다. 하지만 결국 타의에 의해 밤섬에서 구출되고, 다시 고통스러운 세상과 마주한 그는 다시 죽기 위해 63빌딩으로 향합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여자 김 씨는 남자 김 씨를 만나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 그가 탄 버스를 향해 달렸지만 결국 그 버스를 놓치고 맙니다. 하지만 그 순간 민방위 훈련이 다시 시작되고, 달리던 버스는 도로에 멈추게 되어 여자 김 씨는 남자 김 씨가 탄 버스에 올라 그와 마주하게 됩니다.



영화< 김씨표류기 >



이 영화는 2009년에 개봉한 <김씨 표류기>라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여자 김 씨가 왜 자신을 고립이라는 감옥에 가두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가족들이 있을 때에는 방 밖으로 조금도 나가지 않죠. 고립을 자처한 그녀가 모순된 행동을 합니다. 인터넷상에서 미니홈피를 운영하고 있는 일 말입니다. 세상과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 나름의 방법으로 관계를(일방적이긴 하지만) 유지하려는 그녀가 안쓰러웠습니다. 영화에서는 그녀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녀의 삶의 모습을 보고 충분히 어떤 이유에서 고립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 나름 추측해 볼 수 있었습니다.


여자 김 씨는 아마도 가족과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큰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자신이 이해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느껴 세상과의 단절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구요. 그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겠지요.


남자 김 씨 역시 많은 빚 때문에 시달리고, 여자친구에게 마저 버림을 받고 난 후, 자신은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라 여기고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도 자살을 선택한 데 있어 큰 영향이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초라해진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들. '난 쓸모없는 존재야 '라는 생각 때문에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때론 관계의 상처는 고립을 만들기도 한다. 


영화 속 인물들의 관계에 대한 고립과 같은 상황은 우리 현실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다만 영화와 그 모습은 전혀 다르겠지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관계로 이어집니다. 가족구성원으로서의 관계,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교우, 사제지간의 관계, 성인이 되면 직장생활 내에서의 사회적 관계 등등 죽을 때까지 수많은 관계 속에 얽혀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는 좋은 일들이 물론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똑같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개체이기 때문에 관계에서 수많은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관계에서의 갈등은 마음속 깊은 생채기를 내기도 합니다. 그 상처는 삶을 살아가는데 때론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하죠. 관계 속에서 받은 상처들이 켜켜이 쌓이게 되면 어느 순간에 '나'라는 존재가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존중받지 못하는 나자신이 한 없이 작아지고 , 결국 고립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자신을 몰아 붙이고 맙니다.



<당신과 나 사이>의 저자 김혜남 정신분석 전문의는 '너무 멀어서 외롭지 않고 너무 가까워서 상처 입지 않는 거리'를 찾는 법을 말해줍니다.

모든 문제의 90%는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 것을 저 역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쉽게 그 형태나 성질을 단정 지을 수도 없습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고, 때론 여러가지 물리적 조건들 때문에도 수시로 바뀌는 것이 인간 마음이죠.어쩌면 날씨보다 더 변덕스러운 것이 사람 마음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관계를 맺는 것을 기피하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난 괜찮은데 왜 옆에서 더 난리들인거지?!


여러분들은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요즘 들어 혼자 식사를 하는 이들을 자주 보곤 하는데요. 저도 혼밥족중 한사람이랍니다.

최근 7~8년 동안 여행, 쇼핑, 영화관람, 식사, 여가 등 모든 생활의 전반적인 것들을 혼자서 했습니다. 남들 신경 쓸 일 없고, 제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죠. 나 자신에게만 온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는 것이 너무 만족스러웠습니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죠. 그러다 보니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일이 조금씩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가 내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반응이 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 주변에 아무도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전부를 아는 영혼의 단짝 친구도 있고, 손에 꼽긴 하지만 수시로 안부를 묻고 지내는 친구도 있긴 합니다. 친구들은 제가 자신들이 아닌 사람들과도 교류하며 지내기를 바랐지만 저는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관계를 맺는 생각만 해도 피곤이 몰려오더라구요. 그러다 보니 어떤 친구는 저를 농담 삼아 '히키코모리'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쁜녀석 가만 안둘테야)

새로운 '너'를 알아가는 것에 내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것이 아깝고 귀찮았습니다.


'나이도 점점 먹어가는데 굳이 왜 그래야 하지? 지금 이대로 편하고 좋구먼, 다들 난리야 왜?!'






# 둘이 살아 괴롭느니 차라리 혼자 외로운게 나을것 같아



<당신과 나 사이>의 저자는 18년째 파킨슨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녀는 2014년 병이 악화되기 이전까지는 학회, 환자 진료, 인터뷰, 강의 요청 등으로 바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당시 남편은 육아의 몫을 모두 저자에게 전가 시켰죠. 저자는 그것이 무척이나 못마땅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남편의 입장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갈수록 사이는 틀어져만 갔습니다. 일과 육아에 지친 데다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남편 때문에 이혼도 잠시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파킨슨이라는 병을 얻고, 죽을 것만 같은 고통으로 견디며 인간은 외로울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나니, 신기하리만큼 남편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자신과 함께 하기 이전 남편의 생활은 어땠는지를,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기 시작하니 그제야 있는 그대로 그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요즘 1인 가구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대부분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청년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요 근래 50~60대의 이혼율이 증가하면서 1인 가구가 더 많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부부간에 갈등이 있어도 자식들 때문에 참고 살아야 하는 것이 나름의 미덕(?)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이혼에 대한 인식이 바뀐 탓일까요? 서로 맞지 않고 힘들게 사느니 차라리 이혼을 하고 각자의 삶을 선택하자는 50~60대가 많아졌습니다.



사랑을 해서 결혼을 했고,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착각을 흔이 합니다. 우리는 모두 엄마 뱃속이라는 안전하고 완벽한 세상에서 탄생했습니다. 엄마의 배속이라는 온전한 사랑 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합니다.그러나 엄마의 배속에서 나와 생후 6개월이 되기 시작하면서 엄마와 자신이 각각 분리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며 우울감을 처음으로 느낀다고 합니다.



우리는 늘 엄마와 하나였던 그때를 바라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외로움이 느껴질 때면 강박적으로 누군가를 찾아 나선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엄마와 하나였던 그때의 감정을 상대방을 통해 찾으려 하죠. 하지만 함께 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같은 꿈을 꾸고,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과 나는 서로 다른 사람이며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할수록 상대방과의 차이점만을 발견할 수 밖게 없게 됩니다.



다만사랑을 하게 되면,그래서 서로를 이해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게 되면 사람은 다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나와 다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주는 상대에게 깊은 감사를 느끼면서 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당신과 나 사이>P.36




# 아직까진 혼자가 좋아요, 하지만 가끔 외로운건 사실이예요.




어쩌면 제가 혼자인 게 편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마음 같아선 사랑하는 어느 누군가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하면 전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막상 결혼을 하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삶을 나누게 되면 서로의 차이점을 적나라하게 알게 될 겁니다. 그 차이점이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아마 저도 상대방을 바로 이해하려 들기보다 내 방식을 상대방에게 은연중에 강요하겠죠. 그렇게 상처를 주고받고, 아파하게 되고, 외로워질 것이라고 상상하며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차라리 아예 처음부터 관계를 맺지 않는 쪽으로 선택하는 게 낫다고 결론을 지어 버리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은 
상대와 얼마나
잘 지낼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불일치를
감당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톨스토이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는 아직 혼자가 좋습니다. 외로울 때가 있는 건 분명 사실입니다. 힘들었던 가족들과의 관계도 저자가 알려 주었듯이 저만의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제 자신을 무조건 희생하려 들지도 않고 지내고 있는 중입니다.(노력은 하는데 의지대로 되지 않을 때도 종종 있긴하네요 ㅎㅎㅎ)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직장 내에서의 관계가 힘들었던 적이 많았는데,직장동료들과의 거리도 가족처럼 어느 적정선을 지정해 놓고 관계를 맺다 보니 직장 생활도 훨씬 수월해졌습니다.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 맺는 일은 여전히 시작은 어렵지만, 그들과의 관계 역시 나만의 적정거리를 유지하되 서로를 존중하는 사이로 남겨 두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네요. 어쩌다 보니 결혼을 제외한 다른 관계들은 혼자서 터득한 적정거리를 잘 유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혼자 깨우쳤다고 자랑하는 건 아니에요.누군가의 도움덕분에 좀 일찍 알 수 있었던게 저에게는 행운이었죠. ㅎㅎㅎ) 






그래도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 
하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모두를 만족시키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나를 존중하지 않고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들로부터는 스스로를 지켜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과는 후회 없는 인생을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가 소중하고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을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나처럼 '너'라는 존재 역시도 존중해 주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를 위한 적정 거리를 유지할 때 가능한 것 입니다. 각자 생각하는 적당한 거리의 기준은 다를 것입니다. 우리 인간 객체가 저마다 다르듯이, 우리의 삶도 다르니깐요. 어쩌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 함께 조화로이 공존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마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 잔만을 마시지 마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마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마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마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칼릴 지브란의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 참고도서: 당신과 나 사이  -김혜남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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