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있음의 역설
空, 그것은 하나의 무언가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무언가를 정확히 지칭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것을 비어 있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차오른 것이 되기 때문이다.
비어있음은 말해지는 순간 무너진다.
언어는 공을 가둘 수 없고, 지시할 수 없으며, 다만 왜곡할 뿐이다. “없음“이라는 말조차, 존재하는 언어의 산물이다. 그러니 우리가 말하는 空은 진정한 공이 아니다.
그것은 인식된 순간에 有가 되어버린, 실패한 無다.
진정한 공은 의식의 바깥에 있다. 그것은 형상 이전의 형상, 의미 이전의 가능성, 존재 이전의 여백이다. 그러므로 공은 없다는 말로도 설명될 수 없으며, 다만 감지되기 전의 있음과 없음의 중첩된 상태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비어있음을 견딜 수 없다. 비어 있음은 불확실성이고, 불확실성은 곧 불안이다. 그래서 인간은 공을 포장한다. 이름 붙이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공을 파괴한다.
그것이 인간이 안다고, 이해한다고 부르는 행위다.
그 순간부터 공은 더 이상 공이 아니다. 무로서 존재하던 것이, 인식됨으로써 유가 된다.
이것이 인식의 폭력, 존재론의 역설이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모를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인간은 공 앞에 서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자꾸만 공의 가장자리에 의미를 덧칠한다. 의미를 덧칠하지 않으면 미쳐버릴까 봐. 공은 모든 구조의 바닥이기 때문에, 그 바닥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일은 파멸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만든다.
유일한 하나의 유(有).
하나의 선, 하나의 질서, 하나의 신.
그 유는 우리에게 안정을 준다.
유를 하나 세우면, 그 유를 제외한 나머지를 공이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진리를 세운다. 진리를 세워야 비로소, 공을 유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사회는 말한다. 함께 해야 한다고. 공통된 선이 있어야 우리가 안전하다고. 공적 언어, 보편 윤리, 다수의 기준 속에서, 우리는 진리라는 이름의 질서를 공유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진리인가?
당신의 고독은 묻는다.
그 질서가 과연 당신에게도 타당한가라고.
고독은 인간이 공을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타인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에서, 비로소 인간은 세계에 던져진 자신을 직면하게 된다.
절대 선을 이미 아는 자라면, 그는 신일 것이다. 그는 영원한 고독 속에 있을 것이다. 누구와도 그것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이기에.
그러나 우리는 신이 아니다.
우리는 알지 못한다.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만들어야 한다. 만들기 위해 파괴하고, 파괴한 위에 또다시 새로운 의미를 짓는다.
그것이 인간이다. 공의 불안을 견디기 위해 유를 만들어내는 존재. 우리는 허공 위에 발을 디디며, 언어로 삶을 짓고, 기억으로 자신을 엮는다. 그 짓기의 재료를 어디서 가져올 것인지는 오직 당신의 선택이다.
타인의 질서에서 빌려올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어둠 속에서 길어 올릴 것인가.
나는 말하고 싶다.
진리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고독 속에서, 자신을 반복하고,
스스로의 언어로 선을 세우는 자는
비로소 자기 세계의 유와 무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런 자는, 말로 채울 수 없는 그 여백을 서서히 사랑하게 된다.
무엇도 존재하지 않던 그 자리에 자신의 그림자를 천천히 눕히고, 의미를 만들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그저 머무를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채우려 하지 않고, 더 이상 떨지 않는다.
비어있음이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안에 이미 모든 가능성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자신만의 공을 품는다.
울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오직 하나의 존재로서.
그리하여, 그 비어 있음조차 사랑할 수 있을 때, 인간은 가장 가득 찬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삶이 우리에게 허락한 가장 고요하고 가장 깊은 자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