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이라는 폭력
통일성. 안정성. 변하지 않음. 우리는 그것을 안전이라 부르며 갈망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집단이 요구하는 통일성 앞에서 개인의 욕망은 뒷전으로 밀린다. 변화를 향한 불안은 곧 의미라는 이름으로 길들이어진다. 우리는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질서를 부여하고, 그 질서를 진리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다만 집단이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강요한 폭력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권력은 단순히 억압이 아니라 삶의 세세한 틈바구니에 스며들어 규율을 생산한다. 그 속에서 개인은 자신이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잊는다.
새로운 집단에 들어서는 순간, 선택지는 단 두 가지다. 그들의 기준을 내면화하거나, 그들의 악으로 낙인찍히거나. 그 경계 바깥에 머무르는 길은 없다. 집단은 스스로의 규범을 정의라 선포하고, 정의는 곧 진리로 굳어진다. 그리고 진리에 의문을 던지는 순간,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다. “원래 그랬다.” 니체가 말했듯 도덕은 기원 없는 습관이 굳어져 하나의 진리로 위장된 것이다. 원래 그랬다는 말은 곧 질문을 거부하는 사회의 자기 보존적 습관이다.
그렇다면 폭력 속에서 살아남는 길은 납득과 순응뿐이었던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집단이 개인을 동질화하거나, 개인이 집단을 무너뜨리거나. 이 양자택일 속에서 선택은 단순하다. 내가 무너지느냐, 사회가 무너지느냐.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 결판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망각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질문을 중지한 인간은 망각 속에서 살아남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스스로의 주체를 잃어버린다.
망각은 단순한 기억 상실이 아니다. 그것은 집단이 개인에게 주입한 생존 기술이다. 불합리를 “당연하다”로, 폭력을 질서로 둔갑시키는 기술. 우리는 망각 속에서 돌진했고, 돌진 속에서 버텼다. 그러나 묻자. 그 끝에서 바뀌는 것은 무엇인가. 망각이 지운 자리 위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좋은 것인가. 그 답을 내릴 수 있겠는가.
결국 결론은 이 물음으로 돌아온다. 너는 사회가 되고 싶으냐, 아니면 사회가 너를 만들고 싶으냐. 스스로 사회가 되기를 택한다는 것은, 가치의 전도를 감행하는 것이다. 기존의 도덕과 질서를 뒤집고,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것. 그러나 사회가 너를 만들도록 내버려 둔다면, 너는 이미 정해진 기호와 규율 속에서 하나의 기능으로만 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각자의 선택 속에서 살아남는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순히 숨을 잇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역경을 버티며, 부조리를 견디며, 동시에 그 속에서 자기 존재의 이유를 되묻는 행위다.
우리는 인간의 승리를 말하려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승리를 원하는가. 전자가 보편을 향한 비극적 서약이라면, 후자는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붙드는 결연한 선택이다. 답은 늘 질문 속에 숨어 있다.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직시하지 못하거나, 직시하기를 거부할 뿐이다.